여운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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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작성일자=2009년 11월 27일|확인일자=}}
</ref>
 
=== 김일성과의 정치적 연대 의혹 ===
[[김일성]]의 정치 자금을 지원받는 동시에 그는 비밀리에 3.8선을 넘어서 북한에 다녀왔으며, 이후 비밀리에 [[김일성]], [[김두봉]]과도 꾸준히 서신 연락을 주고 받았다. 남로당은 남로당 대로 여운형의 주변에 프락치를 심어 여운형을 감시하기도 했다. 여운형이 혜화동 로터리에서 사망했을 때, 조그마한 손가방을 하나 갖고 있었다.<ref name="jung334">이철승·박갑동, 《건국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계명사, 1998) 334페이지</ref> 그 속에 여운형이 [[1946년]] [[11월 12일]]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이 들어 있었다.<ref name="jung334"/> 여운형이 암살된 후 그의 가방에서 나온 편지 사본에 의하면, 여운형은 [[평양]]을 세 번 정도 방문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ref name="jung268"/>, 여운형은 이 편지에서 [[김일성]], [[김두봉]]의 지도를 바란다는 의견을 적어 놓았다.
 
{{인용문|나는 합당 준비위원회 밑에서 [[사회노동당]]과 남조선로동당이 무조건 합당하도록 요청했습니다. 지금 나는 남로당 측과 교섭 중입니다. ...(이하 중략)... 나는 [[북조선]]의 동지 귀하들이 이 문제에 관하여 나를 도와 주시도록 기대하고 있습니다.<ref name="jung268"/>}}
 
또 다른 편지의 내용을 보면,
 
{{인용문|김일성 동지, 김두봉 동지 귀하! 민주주의 수립을 위한 투쟁에 얼마나 바쁘십니까. 나는 이제 병상에서 일어나 최근 정세가 아주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다시 귀하들에게 이곳의 현황을 간단히 알리려 합니다. 3개 좌익 정당의 합당문제는 희망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br/>[[남조선 로동당]]은 반(半) 지하에 들어간 상태로 조직되고 있습니다. 옛 공산당원들이 그들의 프락치들과 결속하여 남로당을 조직하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그들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한다면, 공산당의 프락치 조직은 강화되고 있습니다.<br/><br/>왜냐하면 인민당의 결성 초기부터 조직부분의 활동은 항상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진행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이하 중략)... 반면 사회노동당은 공산당에 반대하는 그룹에 의해 조직되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남로당]]과 사로당의 합당 준비를 허가했습니다.<br/><br/> 왜냐하면 나는 그것이 내가 취할 제1단계 조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단일 정당을 결성하는 것이 나의 희망이기 때문에 그들이 [[사회노동당]]의 중앙 본부를 설치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나는 합당 준비위원회 밑에서 [[사회노동당]]과 [[남조선노동당]]이 무조건 합당하도록 요청하였습니다. ...(이하 중략)... 나는 [[북조선]]의 동지 귀하들이 이 문제에 관하여 나를 도와주시도록 기대하고 있습니다.<ref>이철승·박갑동, 《건국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계명사, 1998) 334~335페이지</ref>}}
 
여운형은 이렇게 [[김일성]]의 도움을 청했다.<ref name="jung268"/> 여운형은 [[공산당]]과 직접 관계없는 [[미 군정]]청과의 관계도 일일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보고하고, 그들의 양해를 구했다.<ref name="jung268"/> 또한 여운형은 한 편지에서 [[김일성]]에게 '남조선 로동당이 바른 길을 걷도록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ref name="jung268"/>'라고 했다. [[박헌영]]과 [[남로당]]은 여운형의 주변에 프락치를 심어 그가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과 연락하는 것을 포착하기도 했다.
 
[[남로당]] 측의 시각에 의하면 여운형은 원래 북조선의 [[김일성]]과 [[김두봉]]의 지원을 받아 당을 분열시켜서 사로당을 만들었기 때문에 소수파로 전락하여서 김일성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ref name="jung335"/>봤다. 여운형은 김일성에게 공산당 뿐만 아니라, 미 군정 관련 사항도 일일이 보고했을 정도<ref name="jung335"/>였고 남로당은 이를 눈치채고 있었다. [[박갑동]]의 증언에 의하면 '공산당에서는 이러한 여운형의 움직임을 다 알고 있었다<ref name="jung335"/>'고 한다.
 
박갑동은 [[1945년]] [[9월]]부터 해방일보의 정치부 기자로 근무했는데, 이때 여러 정치 지도자들을 만날 수 있어 많은 정보를 모았는데, 이 중에는 여운형이 미 군정사령관 [[존 하지]] 중장에게 불려가서 "왜 가족(아이들)을 [[김일성]]에게 다 갖다 맡겼는가"하는 힐문을 당했다는 소문<ref name="jung339">이철승·박갑동, 《건국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계명사, 1998) 339페이지</ref>도 접하였다. 여운형의 큰딸 [[여난구]]는 [[일본]]에서 온 [[송성철]](宋性撤)과 연애결혼을 하여 그녀만 빼놓고 둘째 딸 여연구 이하 아들딸들을 모두 평양으로 데리고 가서 [[김일성]]의 양자, 양녀로 맡겼다는 것이다.<ref name="jung339"/>
 
[[박갑동]]이 확인한 바에 의하면 여운형의 답은 '자기 아들딸들의 공부에 대하여 [[미국]]은 아무 관심도 표시해 주지 않았는데, [[김일성]]만이 [[모스크바]] 유학을 시켜주겠다고 하여 보냈다<ref name="jung340">이철승·박갑동, 《건국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계명사, 1998) 340페이지</ref> 는 것이었다. 여운형의 답변에 대해 박갑동은 '나는 [[만주]] 마적 출신의 [[김일성]]에게 자기 자식들을 '인질'로 보낸 여운형에게 실망하였다. 이때부터 여운형의 정치노선은 [[김일성]]의 앞잡이가 될 것으로 느끼고, 그의 언동을 주시하게 되었<ref name="jung340"/>'다고 한다.
 
[[1946년]] 여름, 여운형이 평양에 갔다 오더니 자기의 인민당과 [[백남운]]의 [[신민당]]과 같이 3당을 합당하자고 [[공산당]]의 [[박헌영]]에게 제의하였다.<ref name="jung340">이철승·박갑동, 《건국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계명사, 1998) 340페이지</ref> 이것은 [[스탈린]]과 [[북조선]] [[김일성]]의 지령이었다.<ref name="jung340"/> 그러나 3당 합당 대신, 각 당내에서 분파싸움이 시작되어 공산당 내에서는 전당 세포회의를 열어 다수결로 [[김일성]]파를 축출했다. 인민당과 [[남조선 신민당]]에서도 중앙위원회를 열어 다수결로 여운형과 그의 지지파를 출당시키고, 남조선신민당에서도 백남운과 그의 지지파를 제명, 출당시켰다.<ref name="jung340"/>
 
[[1946년]] [[11월 23일]], 3당 합당대회를 겨우 열어 24일에 남조선 신민당의 새 위원장으로 선출된 [[허헌]]을 위원장으로 선출하여 남조선로동당을 결성하게 되었다.<ref name="jung340"/> 11월 24일 회의에 대회의 이름으로 여운형을 특별초청하였다.<ref name="jung340"/> 공산당 측 입장으로는 '이는 남한에서 대중적 인기가 많은 여운형을 김일성 편으로 쫓지 말고 다시 남ㅎ나 쪽으로 돌려 세우려는 배려에서 였다.<ref name="jung340"/>'고 한다. 여운형은 거절하지 못하고 오후에 출석하여 인사말을 했다.<ref name="jung340"/> 그러나 그가 [[남로당]] 결성 당일에 배신자로서 할 수 없이 끌려나온 격이 되었다.<ref name="jung341">이철승·박갑동, 《건국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계명사, 1998) 341페이지</ref> 공산당은 그를 [[김일성]]과 내통, 연락한 정보를 빼냈고, 그를 배신자로 취급하고 있었다. 회의 장소에서는 그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ref name="jung341"/> [[박갑동]]은 '그가 무슨 변명을 하는지 기자석에서 그의 얼굴을 주시했습니다.<ref name="jung341"/>'라고 하였다. 다른 공산당원 역시 그의 발언을 예의주시하였다.
 
{{인용문|여러분은 많은 분은 이미 큰 배를 타고 강을 건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사정으로 여러분과 한 배를 같이 타지 못하고 강가에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있습니다. 나는 그 사람들을 모아 뒷배를 타고 따라가겠습니다.<ref name="jung341"/>}}
 
그가 연설을 끝내자 회장은 터질틋한 박수와 환호 소리로 울렸다.<ref name="jung341"/> 박갑동은 당시 그의 언변에 탄복했다 한다.<ref name="jung341"/> 여운형이 무사히 퇴장하고 대회가 끝날 무렵, 폭탄이 날아들어와 터져서 박갑동의 옆에 앉아 있던 기자가 부상당했다.<ref name="jung341"/> 그러나 여운형은 그날 그가 약속한 바대로 따라오지 않고 [[백남운]]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ref name="jung341"/>했다. 그러나 근로인민당의 보이지 않는 핵심은 일제 때 변절한 좌익들로서 남로당 안에서는 설 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평양]]의 [[김일성]]에 줄을 대고 있었다.<ref name="jung342">이철승·박갑동, 《건국50년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계명사, 1998) 342페이지</ref>
 
그러나 그들을 따라가는 대중은 없었다. [[근로인민당]]이 해체된 후에 여운형은 정치적으로 점점 더 고립되어 갔다.<ref name="jung342"/> 여운형과 떨어진 공산주의자들은 김일성이 직접 파견한 [[성시백]]의 선으로 몰려갔다.<ref name="jung342"/> 김일성은 몰수한 옛 조선은행권을 남한의 성시백 조직에 홍수와 같이 제공하였다.<ref name="jung342"/>
 
[[성시백]]은 [[김일성]]이 보내준 공작금으로 서울에서 두 개의 일간신문을 발행했다.<ref name="jung342"/> 교묘한 위장으로 중앙일보와 우리신문이 당당히 합법신문으로 발행되고 있었는데, 중앙일보는 이우적이, 우리신문은 고석준이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ref name="jung342"/> 이우적과 고석준은 모두 김일성계열의 공산당원이었다.
 
== 신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