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1611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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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위그노]]로 성장하고, 귀족의 아들로써 교육을 받았으나 허약체질로 인해 특히 언어장애가 있었다(평생 고치지 못했다). 튀렌은 역사와 지리에 특별한 재능을 보여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위업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위에서 설명한 장애가 방해가 되었다.
아버지 부용 공작 앙리가 [[1623년]]에 사망하자 튀렌은 신체단련에 몰두하여 태어날때부터 약점이던 허약체질을 벗어나려고 했다. 14살때 그는 숙부인 [[
[[1625년]] 숙부 마우리츠의 뒤를 계승한 또 1명의 숙부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는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은 곧 튀렌을 보병 연대의 대령으로 임명했다. 튀렌은 오라녜공과 단기간 거리를 좁혔다(
[[1635년]] 튀렌은 [[라 발렌트 추기경 루이 드 노가레|라 발렌트 추기경]]의 휘하에 들어가 로렌과 라인강에서 전투를 벌였다. 프랑스군과 그의 동맹군은 [[1635년]] [[8월 8일]] [[마인츠]]에서 [[신성 로마 제국]]군을 포위하기 위해 집결했으나 프랑스군은 식량부족으로 [[메스]]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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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렌은 곧이어 [[룩센부르크]]로 진군했다. 그러나 얼마안가 라인 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1648년]] 바이에른이 다시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연합군을 조직한 것이었다. 튀렌은 휘하의 스웨덴군과 연합하여 눈부신 전적을 거두었고, 5월 17일 시스마르샤우젠 전투에서 결정적인 행동으로 최후를 장식했다. 군대는 그 결과로써 더 확고해졌다. 휴전조약이 체결될때까지 화전과 백병전으로 바이에른을 황폐화 시켰다. 이 파괴는 많은 현대작가들이 비난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으나, 당시 전시의 정신과 전투행위에서 허용한 상황보다 가혹한 방법이 채택된 것은 아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은 프랑스에게 짧은 평화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곧 [[프롱드의 난]](1648년 - 1653년)이 발발했다. 튀렌이 전쟁중에 벌인 행위의 일부가 반대파에 대한 그의 찬성에 의해 날카로운 비판에 휩싸이게 되었다. 바이마르군은 사령관인 튀렌을 따르는것을 거부했고, 튀렌은 남부
2차 전투는 콩데 공작이 1650년 1월에 체포되면서 시작되었다. 콩데 공작과 더불어 체포될 계획이 있었던 튀렌은 그때 도망쳐 롱그빌 공작부인 안느와 만나 콩데 공작, 그의 동생 아르망, 롱그빌 공작의 목적을 위해 스타네이를 확보했다. 프롱드의 난 제1차, 2차도 안느에 대한 애정이 튀렌의 행동을 지배했었던것으로 보이고, 콩데 공작을 위해 스페인의 원조를 얻었다. 이 전투에서 튀렌은 루트르에서 2,3번의 역전 중 하나를 생각했다(1650년 12월 15일). 그러나 2번째 대립은 같은해 빠른시기에 왕당파의 와해와 콩데 공작의 석방으로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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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2년]] 튀렌은 오랫동안 존경하던 [[개신교]] 신자이자 프랑스 원수인 포르스 공작의 딸 샤를로트 드 코몽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는 양쪽의 적대하는 진영 중간에서 그리스도교의 불화를 마음속 깊이 한탄하고 있었다. 그는 항상 다수의 의견과 다르다고 억압하는 일파의 영향을 신용하지 않았다. 영국군과 국민의 독립과정이 그의 생각에 깊은 인상을 주었고, 그리고 영국의 장로파 교회가 갑자기 [[왕정복고]]로 전환하는 무질서한 모습에서 공포를 느껴 튀렌은 결국 가톨릭 교회측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와 아내 샤를로트 사이에서 교환된 편지에서는 이러한 두 사람과도 밀접한 이 사건에 대해 효과적인 증언을 배울 수 있었다. 2년 후 샤를로트가 죽고 편지 교환이 끝나고, [[자크 베니뉴 보쉬에]] 주교의 열변과 튀렌의 조카의 설득으로 그는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했다(1688년 10월). [[1667년]] 튀렌은 결국 왕당군으로 돌아왔고, 프랑스군의 남부
==대
루이 14세가 [[1672년]]
[[1673년]] 1월 튀렌은 공세에 나서 독일 영내 깊숙이 들어와 [[브란덴부르크 주|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브란덴부르크의 프리드리히 빌헬름|프리드리히 빌헬름]]와 화평을 맺었다. 그해 말 유명한 신성 로마 제국의 장군 [[라이몬드 몬테쿠롤리]]가 완벽하게 튀렌을 속였다. 몬테쿠롤리는 적을 피하고,
가을쯤 대 프랑스 동맹이 다시 진격하여 그들은 다시 튀렌을 속였다. 중립도시 스트라스부르의 행동이 이 마을에 있던 다리로부터 적이 라인강을 건널 수 있도록 허락해 그의 실패원인이 되었다. 엔츠하임 전투가 뒤이어 일어났다. 이 전투는 전술상의 승리를 증명한 것이나 완전한 승리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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