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1611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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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위그노]]로 성장하고, 귀족의 아들로써 교육을 받았으나 허약체질로 인해 특히 언어장애가 있었다(평생 고치지 못했다). 튀렌은 역사와 지리에 특별한 재능을 보여 [[알렉산드로스 대왕]]과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위업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위에서 설명한 장애가 방해가 되었다.
 
아버지 부용 공작 앙리가 [[1623년]]에 사망하자 튀렌은 신체단련에 몰두하여 태어날때부터 약점이던 허약체질을 벗어나려고 했다. 14살때 그는 숙부인 [[네델란드네덜란드 총독]] [[마우리츠]]의 야영지에서 군사학을 배우도록 보내졌고, [[네델란드네덜란드 독립전쟁독립 전쟁]]에서 군사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처음엔 숙부 마우리츠의 경호를 맡은 사병이 되었다.
 
[[1625년]] 숙부 마우리츠의 뒤를 계승한 또 1명의 숙부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는 네델란드네덜란드 총독 및 [[오라녜 공작]]에 즉위한 후 [[1626년]] 조카인 튀렌을 육군대위로 승진시켰다. 젊은 하사관은 그 시기 포위전 임무를 수행하였다. [[1629년]] [[스베르트 헨보스]] 포위전 승리에서 보인 튀렌의 수완과 용기는 당대 일류 사령관 중 1명이었던 숙부 프레데리크 헨드리크로부터 극찬을 받았다. 1640년 튀렌은 네델란드를네덜란드를 떠나서 프랑스군에 입대했다. 군대 내에서의 승진예상 뿐 아니라, 프랑스 왕가에 대한 부용 공작가문의 주권과 충성을 보여주기 원했던 모친의 바램이 동기가 되었다.
 
재상 [[리슐리외]] [[추기경]]은 곧 튀렌을 보병 연대의 대령으로 임명했다. 튀렌은 오라녜공과 단기간 거리를 좁혔다(네델란드와네덜란드와 프랑스는 당시 동맹관계였다). 튀렌이 프랑스군에 있으면서 벌인 최초의 실전은 [[1634년]] [[Jacques-Nompar de Caumont, duc de la Force|포르스 공작]]이 지휘한 [[로렌]]의 [[라 몽드 앙 바시니]] 포위전이었다. 그가 돌격때 보인 전공으로 육군 소장의 지위로 단숨에 승진했다.
 
[[1635년]] 튀렌은 [[라 발렌트 추기경 루이 드 노가레|라 발렌트 추기경]]의 휘하에 들어가 로렌과 라인강에서 전투를 벌였다. 프랑스군과 그의 동맹군은 [[1635년]] [[8월 8일]] [[마인츠]]에서 [[신성 로마 제국]]군을 포위하기 위해 집결했으나 프랑스군은 식량부족으로 [[메스]]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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튀렌은 곧이어 [[룩센부르크]]로 진군했다. 그러나 얼마안가 라인 전선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1648년]] 바이에른이 다시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고 연합군을 조직한 것이었다. 튀렌은 휘하의 스웨덴군과 연합하여 눈부신 전적을 거두었고, 5월 17일 시스마르샤우젠 전투에서 결정적인 행동으로 최후를 장식했다. 군대는 그 결과로써 더 확고해졌다. 휴전조약이 체결될때까지 화전과 백병전으로 바이에른을 황폐화 시켰다. 이 파괴는 많은 현대작가들이 비난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으나, 당시 전시의 정신과 전투행위에서 허용한 상황보다 가혹한 방법이 채택된 것은 아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은 프랑스에게 짧은 평화를 안겨주었다. 그러나 곧 [[프롱드의 난]](1648년 - 1653년)이 발발했다. 튀렌이 전쟁중에 벌인 행위의 일부가 반대파에 대한 그의 찬성에 의해 날카로운 비판에 휩싸이게 되었다. 바이마르군은 사령관인 튀렌을 따르는것을 거부했고, 튀렌은 남부 네델란드로네덜란드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곳에서 프롱드의 난 제1차가 끝나는 루이유 화의(1649년 3월)가 체결될때까지 머무르게 되었다.
 
2차 전투는 콩데 공작이 1650년 1월에 체포되면서 시작되었다. 콩데 공작과 더불어 체포될 계획이 있었던 튀렌은 그때 도망쳐 롱그빌 공작부인 안느와 만나 콩데 공작, 그의 동생 아르망, 롱그빌 공작의 목적을 위해 스타네이를 확보했다. 프롱드의 난 제1차, 2차도 안느에 대한 애정이 튀렌의 행동을 지배했었던것으로 보이고, 콩데 공작을 위해 스페인의 원조를 얻었다. 이 전투에서 튀렌은 루트르에서 2,3번의 역전 중 하나를 생각했다(1650년 12월 15일). 그러나 2번째 대립은 같은해 빠른시기에 왕당파의 와해와 콩데 공작의 석방으로 종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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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2년]] 튀렌은 오랫동안 존경하던 [[개신교]] 신자이자 프랑스 원수인 포르스 공작의 딸 샤를로트 드 코몽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는 양쪽의 적대하는 진영 중간에서 그리스도교의 불화를 마음속 깊이 한탄하고 있었다. 그는 항상 다수의 의견과 다르다고 억압하는 일파의 영향을 신용하지 않았다. 영국군과 국민의 독립과정이 그의 생각에 깊은 인상을 주었고, 그리고 영국의 장로파 교회가 갑자기 [[왕정복고]]로 전환하는 무질서한 모습에서 공포를 느껴 튀렌은 결국 가톨릭 교회측으로 돌아서게 되었다.
 
그와 아내 샤를로트 사이에서 교환된 편지에서는 이러한 두 사람과도 밀접한 이 사건에 대해 효과적인 증언을 배울 수 있었다. 2년 후 샤를로트가 죽고 편지 교환이 끝나고, [[자크 베니뉴 보쉬에]] 주교의 열변과 튀렌의 조카의 설득으로 그는 가톨릭 신앙으로 개종했다(1688년 10월). [[1667년]] 튀렌은 결국 왕당군으로 돌아왔고, 프랑스군의 남부 네델란드네덜란드 침공을 지휘했다(보통은 루이 14세가 지휘). 곧이어 왕과 화해한 콩데 공작은 [[프랑슈콩테]] 지방을 재빨리 정복하여 튀렌과 전공을 다투었고, 1668년 2월 [[네델란드네덜란드 계승전쟁]]([[프랑스-네델란드네덜란드 전쟁]])을 종결로 이끌었다.
 
==대 네델란드네덜란드 전쟁==
루이 14세가 [[1672년]] 네델란드네덜란드 전쟁을 일으키자, 튀렌은 네델란드네덜란드 여러 주를 황폐화시키고, [[암스테르담]] 시를 항복시키려고 프랑스군을 이끌었다. 루이 14세가 실행한 이 수단은 오라녜 공작 [[빌렘 3세]]에게 가혹한 저항운동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빌렘 3세는 제방을 무너뜨려 암스테르담 주위의 국토를 침수시켰다. 이 영웅적인 방법은 완전히 튀렌을 견제하게 만들었고, 루이 14세는 지휘를 포기하고 현장을 떠났다. 이 사건은 유럽전역으로 퍼졌고, 전투는 독일에까지 넓혀지게 되었다. 튀렌은 콩데 공작이 알자스를 제압하는 사이 라인강 중류지역에서 책략을 꾸며 승리를 거두었다.
 
[[1673년]] 1월 튀렌은 공세에 나서 독일 영내 깊숙이 들어와 [[브란덴부르크 주|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브란덴부르크의 프리드리히 빌헬름|프리드리히 빌헬름]]와 화평을 맺었다. 그해 말 유명한 신성 로마 제국의 장군 [[라이몬드 몬테쿠롤리]]가 완벽하게 튀렌을 속였다. 몬테쿠롤리는 적을 피하고, 네델란드군과네덜란드군과 연합해 [[본]]을 전략상의 요충지로 만들었다. 그러나 1674년 6월 튀렌은 자츠하임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그는 라인 궁중백의 궁내관이 되었다. 파리에서 전해진 명령으로 인해 프랑스군은 국토를 먼 곳까지 돌아다니며 황폐화 시키고, 투르크하임 약탈을 벌인 일련의 행위는 항상 튀렌의 명성에 중대한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가을쯤 대 프랑스 동맹이 다시 진격하여 그들은 다시 튀렌을 속였다. 중립도시 스트라스부르의 행동이 이 마을에 있던 다리로부터 적이 라인강을 건널 수 있도록 허락해 그의 실패원인이 되었다. 엔츠하임 전투가 뒤이어 일어났다. 이 전투는 전술상의 승리를 증명한 것이나 완전한 승리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