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몽골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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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하여 [[1259년]](고종 46년) 음력 3월 박희실(朴希實)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자랄타이와 회견, 왕의 출륙과 입조를 약속하고 [[고려 원종|태자 전(倎)]] 등 40여 명을 몽골에 보내고 강도의 성을 헐게 하여 고려의 강화 태도에 확증을 보이니 28년간의 싸움 끝에 드디어 고려는 굴복하였다. 그해 음력 6월 고종이 죽고 태자가 귀국하여 왕위에 올라 [[고려 원종|원종]](元宗)이 되었는데, 그는 몽골에 태자를 다시 인질로 보내어 성의를 표시하였으나 강화에서 나오지는 않았다.
그 후 강도에서는 무신간의 알력이 생겨 한때 왕이 폐위되었으나 다시 복위하였고, 몽골의 초청을 받고 연경(燕京)에 들어갔다가 [[1270년]](원종 11)에 귀국하여 개경에 환도하니 이로부터 고려는 몽골의
== 영향 ==
고려는 강화도의 작은 섬을 안전지대로 삼아 근 40년간 질풍 같은 몽골의 대군을 맞아 항전하는 동안 상하 모든 사람은 민족의식과 애국심이 극히 왕성하였는데, [[삼별초의 난]]을 일으킨 무사들의 항거정신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으며, 특히 부처의 힘을 빌고자 15년간에 걸쳐 《[[팔만대장경]]》을 완성한 사실은 한국 역사상 주목할 만한 문화의 형성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신흥 제국 몽골의 팽창 정세를 정확히 관찰하지 못한 무신정권의 허술한 오판으로 자초한 전란이기도 해서 국내 각지는 적의 침략을 당하여 국토는 황폐해지고 민족의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문화재는 소실되고 정치적으로는 몽골의
그러나 동서 문화의 교류에 힘쓴 몽골의 영향을 받아 천문·의학·수학·역법(曆法)·예술·목화·화약·정주학(程朱學) 등이 전래되어 고려 문화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원나라의 상류층 사회에서도 [[고려양]](高麗樣)이 유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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