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간섭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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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의 간섭기지배기'''는 [[원나라]]가 [[고려]] 영향력을지배 행사하던하던 [[고려 고종충렬왕|고종충렬왕]] 말기부터때부터 [[공민왕]] 초기까지를 일컫는다.
 
== 원의 내정 간섭지배 ==
 
=== 일본 원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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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왕실의 변질 ===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원나라로 말미암아 초래된 고려 왕실의 변질이었다. 당시 원종은 병력을 빌려 임연(林衍) 부자를 타도하고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였으며, 왕권 강화를 위해 원나라 제실(帝室)의 공주를 정비(正妃)로 삼았고, 그 비의 몸에서 난 아들을 원칙으로 왕을 삼았다. 말하자면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 또는 속국屬國)이 된 셈이다되었다. 이후 역대 제왕은왕은 세자로 있을 때에는 독로화(禿魯花, 볼모)로서 북경에 머물다 즉위하게 되었다. 또한 왕은 몽골식 이름을 갖게 되고 몽골식 변발(辮髮)과 의복을 입었으며, 또 몽골어를 사용하다시피 하였다. 원 황제가 고려왕을 즉위 시키거나 폐위 시키기도 하였고, 사형이나 귀양을 보내기도 했다.
 
이제 고려의 왕은 독립된 왕국의자주국의 통치자가 아니라 원나라 제실(帝室)의제국의 부마로제후가 되었으며, 고려 왕실도 따라서 그 격이 낮아졌다. 왕은 조(祖)나 종(宗)을 붙여서 묘호(廟號)를 지을 수가 없게 되었고, 그 대신 ‘왕(王)’자를 사용하게 되었다. 게다가 원나라에 대한 충성심의 뜻으로 ‘충(忠)’자를 덧붙였다. 짐(朕)은 고(孤)로, 폐하(陛下)는 전하(殿下)로, 태자(太子)는 세자(世子)로, 선지(宣旨)는 왕지(王旨)로 격하되었다. 왕위의 폐립(廢立)을 원나라가 좌우하는 일이 많았다. 관제도 많이 축소·개편·폐합되어, 충렬왕 때는 3성(三省)이 통합되어서 [[첨의부]]로, 도병마사가 [[도평의사사]]로 개칭되었다. 또 이부(吏部)·예부(禮部)를 합쳐서 전리사(典理司)로, 호부(戶部)는 판도사(版圖司), 병부(兵部)는 군부사(軍簿司), 형부(刑部)는 전법사(典法司)로 하였으며, 공부(工部)는 없앴다. 한때 [[충선왕]]은 이 관호(官號)를 복구시키려고 하였으나 실패했다.
 
=== 독립의왕조의 유지 ===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고려 왕실은왕조는 [[독립국|독립유지할 왕국]]의 군주로서의 지위를 끝내 유지하였다있었다. 원나라는 [[정동행성]]을 통하여 고려에 간섭하려고 하기도 했으나 고려 군신의 완강한 반대로 실패하였다. 원나라는 또 고려의 영토에 [[쌍성총관부]], [[동녕부]]를 두었고,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했는 바 고려는 쌍성총관부를 제외하고는 이를 되돌려 받았다.
 
=== 조공 요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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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과의 사이에 야기된 새로운 정치 문제는 남만주 일대를 관할하는 [[심양왕]]과의 관계였다. 이러한 고려 왕족의 심양왕 임명은 그 지방에 거주하는 고려민의 통제에 편할 뿐만 아니라, 또한 고려를 견제하게 하려던 것이다. 그 결과 고려 왕과 심양왕 사이에 대립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것은 원나라가 바라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이 그 목적을 달성하였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며, 원나라의 대(對)고려 정책에서 주목되어야 할 점의 하나이다.
 
== 원나라원나라로 세력의부터 축출과주권 회복과 개혁 추진 ==
고려 사회의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개혁정치는 원나라 세력을 축출하기 전에도 시도되었으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1298년]]에 충렬왕으로부터 [[선위]]를 받은 [[충선왕]]은 즉위 교서를 통해 인사 행정 및 토지 겸병의 문제 등 국정 전반에 대한 개혁의 의지를 천명하였다. 그는 [[정방]]을 폐지하고 사림원(詞林院)을 설치하여 개혁정치를 추진하는 한편 전반적인 관제도 개정하였다. 그러나 부원 세력이 중심이 된 기득권 세력의 책동과 원나라의 내정 간섭에지배에 따라 그가 퇴위하고폐위되고 충렬왕이 다시 즉위함으로써 개혁 정치는 실패하고 관제 개혁도 원점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충목왕]](忠穆王) 즉위([[1344년]]) 후에는 개혁 전담부서인 [[정치도감]](整治都監)이 설치되어 개혁이 추진되었으나([[1347년]]), 역시 부원 세력의 방해와 원나라의 간섭으로지배로 실패하고 말았다.
 
중앙 정부의 정치는 표류하고 있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새로운 사회주도층인 신흥 사대부층(신흥양반)이 성장하고 있었다. 가중되는 수탈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농민들의 자구 노력이 기울여지는 가운데 신흥사대부들의 새로운 농서(農書)의 편찬 등에 힘입어 농업기술의 발달이 이루어짐으로써 농업생산이 증가하였다. 지방에 생활기반을 둔 중소지주층이었던 신흥사대부들은 농업생산력의 증가로 새로운 경제적인 힘을 갖게 되었다. 신흥사대부들은 선대가 지방의 향리 출신인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과거에 급제하거나 군공(軍功)을 쌓아 문무품관리직을 획득하였으며, 사상적으로는 신유학(新儒學), 즉 성리학의 소양을 갖춘 지식층이었다. 이들은 점차 중앙에 진출하여 세력이 확대되고 있었으며, 사회문제의 개혁을 열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