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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의
== 원의
=== 일본 원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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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왕실의 변질 ===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원나라로 말미암아 초래된 고려 왕실의 변질이었다. 당시 원종은 병력을 빌려 임연(林衍) 부자를 타도하고 [[삼별초의 난]]을 진압하였으며, 왕권 강화를 위해 원나라 제실(帝室)의 공주를 정비(正妃)로 삼았고, 그 비의 몸에서 난 아들을 원칙으로 왕을 삼았다. 말하자면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駙馬國 또는 속국屬國)이
이제 고려의 왕은 독립된
===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고려
=== 조공 요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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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과의 사이에 야기된 새로운 정치 문제는 남만주 일대를 관할하는 [[심양왕]]과의 관계였다. 이러한 고려 왕족의 심양왕 임명은 그 지방에 거주하는 고려민의 통제에 편할 뿐만 아니라, 또한 고려를 견제하게 하려던 것이다. 그 결과 고려 왕과 심양왕 사이에 대립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것은 원나라가 바라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이 그 목적을 달성하였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며, 원나라의 대(對)고려 정책에서 주목되어야 할 점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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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사회의 문제를 바로잡기 위한 개혁정치는 원나라 세력을 축출하기 전에도 시도되었으나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1298년]]에 충렬왕으로부터 [[선위]]를 받은 [[충선왕]]은 즉위 교서를 통해 인사 행정 및 토지 겸병의 문제 등 국정 전반에 대한 개혁의 의지를 천명하였다. 그는 [[정방]]을 폐지하고 사림원(詞林院)을 설치하여 개혁정치를 추진하는 한편 전반적인 관제도 개정하였다. 그러나 부원 세력이 중심이 된 기득권 세력의 책동과 원나라의
중앙 정부의 정치는 표류하고 있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새로운 사회주도층인 신흥 사대부층(신흥양반)이 성장하고 있었다. 가중되는 수탈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농민들의 자구 노력이 기울여지는 가운데 신흥사대부들의 새로운 농서(農書)의 편찬 등에 힘입어 농업기술의 발달이 이루어짐으로써 농업생산이 증가하였다. 지방에 생활기반을 둔 중소지주층이었던 신흥사대부들은 농업생산력의 증가로 새로운 경제적인 힘을 갖게 되었다. 신흥사대부들은 선대가 지방의 향리 출신인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과거에 급제하거나 군공(軍功)을 쌓아 문무품관리직을 획득하였으며, 사상적으로는 신유학(新儒學), 즉 성리학의 소양을 갖춘 지식층이었다. 이들은 점차 중앙에 진출하여 세력이 확대되고 있었으며, 사회문제의 개혁을 열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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