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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yoreongdaegun.JPG|160px|left|thumb|둘째 형 [[효령대군]]]]
 
[[1413년]] 17살에 충녕대군(忠寧大君)이 되었다. 후대의 사서와 그를 유난히 존경했던 [[대한민국]]의 초기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 [[박정희]](朴正熙) 등에 의해 그는 형제간에 우애가 깊은 인물이고, 부모에게 지극한 효자로 각인되었다. 그러나 그는 형들을 일종의 라이벌로 인식하고 있었고, 자신의 형 [[효령대군]]이 세자의 자리를 희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더욱 독서와 학문연구에 정진하기도 한다. 넷째 동생으로 병약한 [[성녕대군]]에게는 동기간 중 자신이 병간호를 할만큼 유난히 각별했는데, 그러나 [[성녕대군]]은 일찍 죽고 만다.
 
실록에는 그의 도발적 행동도 기록되어 있다.<ref name="Joseon0602">[http://www.chosun.com/culture/news/200504/200504150255.html 세종 "나도 임금감"… 황희는 매관매직?] 조선일보 2005년 04월 15일자</ref> 충녕대군은 “임금의 아들이라면 누군들 임금이 되지 못하겠습니까”라는 한 신하의 위험한 발언을 아버지 태종에게 전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세자인 양녕대군에게 “마음을 바로잡은 뒤에 몸을 꾸미라”고 충고하기도 하였다.<ref name="Joseon0602"/> 이 일로 [[양녕대군]]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후대의 역사학자 [[박시백]]은 "충녕대군의 행동이 세자를 향한 충정이었을까, 아니면 도전이었을까?"라며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다.<ref name="Joseon06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