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해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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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생애 초반초기 ===
[[선조]]와 [[공빈 김씨]](뒤에 [[공성왕후]]로 추존)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서장자였다. 3세 때에 어머니 [[공성왕후]]를 잃었다. [[1585년]] 허명(許銘)의 딸과 가례를 올렸다.<ref>선조 19권, 18년(1585 을유 / 명 만력(萬曆) 13년) 4월 17일(무오) 5번째기사</ref> 그의 유일한 후견인이었던 외조부 [[김희철 (조선)|김희철]]도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전사했다.<ref>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8월 1일(무자) 11번째기사</ref>
 
=== 임진왜란 ===
[[임진왜란]] 때에는 동생 [[순화군]]과 함께 [[함경도]]로 떠나 병력을 모으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ref>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4월 14일(계묘) 23번째기사</ref> 하지만 민가를 약탈하고 주민을 살해하는 등의 일로 반감을 사, 결국 선조 25년임진년 7월 23일,<ref>선조 31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10월 19일(을사) 5번째기사, 경성판관 [[이홍업]]이 가져온 가토의 편지. 왕자들이 보낸 편지엔 7월 24일로 되어있다.</ref> 임해군과 순화군은 함경도 주민들을 비롯한 [[순왜]] [[국경인]] · [[국세필]] 등에게 포박되어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졌다.(회령의 변고)<ref>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7월 1일(무오) 16번째기사</ref> 이후 임해군은 몇 차례의 포로협상으로 풀려났으나, 성격에도 문제가 있어,<ref>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4월 14일(계묘) 21번째기사</ref> 결국 임해군은 선조의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왕세자로 책봉되지 못했다.<ref>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5월 1일(경신) 17번째기사</ref>
 
그의 유일한 후견인이었던 외조부 [[김희철 (조선)|김희철]]도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터지자 전사했다.<ref>선수 26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8월 1일(무자) 11번째기사</ref>
 
또한 [[양사]]는 임해군이 임란 이후에도 민가를 약탈하거나 공물을 횡령하고 무고한 사람을 죽인다는 등의 이유로 파직해야 된다는 상소를 계속해서 올렸다.<ref>선조 202권, 39년(1606 병오 / 명 만력(萬曆) 34년) 8월 24일(경신) 2번째기사</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