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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돗물은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획기적인 발명품 중의 하나이다. 영국의 의학전문지 브리티시메디컬저널에 따르면, 위생적인 수돗물의 공급은 1840년 이래로 가장 중요한 의학적 진보라는 평가를 받았다.<ref> Annabel Ferriman
, "BMJ readers choose the "Sanitary revolution" as greatest medical advance since 1840" 《British Medical Journal》, 2007, 334</ref> 최근 세계보건기구(WHO)의 발표 역시 이같은 평가를 뒷받침한다. 안전한 식수와 개인 위생 향상을 통해 질병의 위험을 9.1% 낮출 수 있으며, 6.3%의 죽음을 예방할 수 있다.<ref>John Zarocostas
, "Safer drinking water and better sanitation could lower disease burden by 9%, says WHO" 《British Medical Journal》, 2008, 337</ref> 수돗물은 위생적인 물을 효율적으로 시민들에게 공급한다는 측면에서 의의가 있다. 물은 부피가 커서 대량으로 운송하기도 어렵고, 보관하기도 어려웠는데, 수도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 기여했다. 즉 과거 하나하나의 통에 담아 운반할 수밖에 없었던 물을, 인간의 생활공간 한 가운데로 흐르게 한 것이 수도이다.
== 수돗물의 역사 ==
=== 로마의 수돗물 ===
==== ''수도를 세계 최초로 설계하고 건설한 사람: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
==== ''세계 최초의 수도: 아피아 수도'' ====
==== ''지속적으로 늘어난 로마의 수도'' ====
=== 정수처리를 거쳐 수돗물을 공급하기 시작한 영국과 미국 ===
==== ''식수난에 빠진 런던'' ====
==== ''수도회사의 설립'' ====
템즈강의 물은 그냥 마실 정도로 깨끗하지는 않았다. 그러다보니 로마의 수도처럼 멀더라도 깨끗한 수원지에서 물을 가져오는 방법이 논의되었다. 수도 건설에 있어서, 로마와 런던의 차이점이라면, 로마는 정부 재정으로 수도가 건설된 반면, 런던에는 1619년에 수도를 전문적으로 하는 회사가 설립되었다는 것이다.<ref name="history" />
==== ''위생적인 수돗물 생산 공정의 도입'' ====
산업혁명으로 인해 생산 활동이 증대되고,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게 된다. 이에 따라 하천의 오염이 심각해지는데, 콜레라 등 각종 수인성 전염병이 창궐했다. 영국의 완속사 여과법은 이런 배경하에서 위생적인 수돗물 생산을 목적으로 시작됐다. 1804년 영국의 파슬리(Paisley)에 의해 시작된 완속사 여과법(Slow Sand Filtration)은 영국식 여과법이라고도 불리는데, 물이 자연스럽게 모래 층을 투과하면서 여과되는 방식을 말한다. 이에 반해 급속사 여과법은 1884년 미국의 하이얏(A. Hyatt)이 황산철을 사용하는 응집법을 개발하면서 시작되는데, 미국식 여과법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미국 뉴저지주 서머밀에서 처음 채택된 방식이다. 다시 말하면, 이 급속사 여과법은 약품을 투입해서 이물질을 크게 뭉치게 섞은 후, 가라앉게 하고, 여과를 시킨다. 그 후 염소 소독을 하는 방식으로서, 현재 세계 각국에서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다.
<ref>[http://www.jincheon.go.kr 수질관련정보]</ref>
=== 우리나라 근대 상수도 역사 ===
조선 시대에 물과 관련된 생활상은 1912년에 발행된 “조선의 상수도”라는 자료를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시 서울의 경우 우물은 9,241개소가 있었는데, 그 중 12%인 1,091개만이 마시기에 적합하고, 나머지는 부적합했다고 한다. 사용 가구별로 보면, 우물을 사용한 가구는 총 3만 8호였는데, 그 중 42.5%인 1만 2,739호가 마시기에 적합한 물을 사용하고 있었으며, 나머지 57.5%는 마시기에 부적합한 물을 먹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하천물을 이용하고 있던 가구도 8,107호로 전체 가구 수를 기준으로 보면, 다섯 가구 중 네 가구는 우물물을, 다섯 가구 중 한 가구는 하천물을 마시고 있었다. 우리나라 근대 상수도의 시작은 19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해 12월 9일 미국인 콜브란(C. H. Collbran)과 보스트윅(H. R. Bostwick)은 고종황제로부터 상수도 부설 경영에 관한 특허를 받았다. 그들은 이 특허를 1905년 8월에 영국인이 설립한 대한수도회사(Korea Water Works Co.)로 양도했고, 이 회사가 1906년 8월에 착공하여 1908년 9월 1일에 서울의 뚝도 정수장을 준공하게 된 것이다. 당시 서울 뚝도 정수장의 규모는 침전지 2개, 여과지 5개, 정수지 1개를 갖추고 하루 1만 2,500톤의 위행적인 물을 생산했다. 이 물은 당시 12만 5천 명에게 공급되는 것으로 계획된 것이었다.<ref>[http://www.kwater.or.kr 물정보관]</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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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돗물 생산 및 공급 과정 ==
아래는 일반적인 수돗물 생산 및 공급 과정이다. 우리나라의 수돗물은 주로 지방자치단체나 수자원공사 등에서 생산하는데, 각 공급자들은 대체로 아래와 같은 과정을 거치지만, 세부적인 면에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ref> 환경부, 《재밌는 물 이야기》, 2010, 15-16</ref>
==== ''취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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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꼭지'' ====
수돗물이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곳이 수도꼭지이다. 각 가정에서는 수도꼭지를 통해 수돗물을 받아서 쓸 수 있다.
== 주석 ==
<references/>
== 참고자료 ==
* 환경부, 《재밌는 물 이야기
* http://water.seoul.go.kr
* http://www.kwater.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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