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 동수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Dikinodon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20번째 줄:
 
== 배경 ==
[[후삼국 시대]] 당시 [[고려]]와 [[후백제]]는 처음에는 별다른 충돌 없이 평화롭게 지냈으나 [[926년]] 9월9월에 후백제 왕 [[견훤]]이 [[고려]] 근품성을 공격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927년]]이후로 [[8월]]고려와 [[견훤]]은후백제는 군사를수차례에 이끌고걸쳐 대대적으로충돌하였다. [[신라]]를 정벌하기 위해과정에서 [[신라]] [[문경시|근암성]](현재대체로 [[문경시고려]])과 [[영천시|고울부]](현재 [[영천시]])공격해 함락시키고지지하였는데, 수도이는 [[경주시|금성견훤]](현재 [[경주시|경주]])로신라의 진군했다.무관 [[신라출신임에도 경애왕]]은불구하고 [[왕건]]에게모반을 구원을일으켜 요청해스스로 왕건은나라를 [[9월]]일으킨 역적이라고 1만간주되었기 명의 군사를 원군으로 보냈다때문이다. 그러나 고려군이 도착하기 전 후백제군이 먼저 [[경주시|경주]]를 점령하여 [[경애왕]]을 자결하게 하고 경순왕을 새 왕으로 세웠다. 이에 [[왕건]]은 5000명의때문에 군사를견훤은 이끌고 후백제군을신라에 격파하기불만을 위해품고 출전했다지냈다.
 
[[927년]] [[8월]], [[견훤]]은 마침내 [[신라]]를 정벌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신라]] [[문경시|근암성]](현재 [[문경시]])과 [[영천시|고울부]](현재 [[영천시]])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수도 [[경주시|금성]](현재 [[경주시|경주]])로 진군했다. 위기를 느낀 [[신라 경애왕]]은 고려 왕 [[왕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왕건은 신라를 돕기 위하여 [[9월]] 초에 시중 공선에게 1만 명의 군사를 맡겨 원군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고려군이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후백제군이 [[경주시|경주]]를 점령하여 친고려적인 행동을 자주 하였던 [[경애왕]]을 자결하게 하였으며 경순왕을 새 왕으로 세웠다. 또한 왕제 효렴과 재신 영경 등을 포로로 사로잡았으며, 보물들을 약탈한 후에 귀환길에 올랐다. 이 소식을 접한 [[왕건]]은 크게 분노하여 친히 5000명의 정예 기병을 이끌고 퇴각하는 후백제군을 격파하기 위해 출전했다.
 
== 전투 과정 ==
[[왕건]]은 [[대구]] 공산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이 틈을 노려 견훤군이 왕건군을 기습 공격했고 5000명의 고려군을고려군은 우왕좌왕하며 혼란에 빠졌다. [[왕건]]의 부하 [[신숭겸]]이 [[왕건]]의 복장으로 [[왕건]]을 대신해 싸우다가 전사했고 부하 [[김낙]]도 [[왕건]]을 자신의 말에 태우고 가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어 [[전의갑]]과 [[전이갑]] 형제도 싸우다가 전사했다. [[왕건]]은 겨우 탈출했으나 8명의 장수를 잃고, 5000명의 군사 중 4930명이 전사하고 불과 70명만 살아돌아왔다.
 
[[왕건]]은 간신히 탈출하여 목숨을 건졌으나, 8명의 장수를 잃었으며 5000명의 군사 중 4930여명이 전사하고 불과 70명 정도의 병사들만이 살아돌아오는 참패를 당하였다. [[견훤]]은 고려군을 크게 이기자 승세를 타서 대목군(大木郡)과 칠곡군(漆谷郡), 약목면(若木面)을 쳐서 빼앗았으며, 고려군이 양식으로 쓰던 곡식을 빼앗아 불살라 버렸다.
 
== 결과 ==
[[File:Battle of Mt.Kongsan.jpg|thumb|left|250px|[[공산 전투]]에서<br>(공산성 전투에서 ([[신숭겸]] 장군(우측에 선 이)과 [[태조 왕건]](오른쪽에서 두 번째 앉은 이))]]
 
[[고려]]는 이 전투에서 건국 이래 최대의 패전을 당하게 되고 이후로 [[후백제]]와 수차례 싸우면서 계속 패하여 수세에 몰렸다. 이러한 형국은 [[왕건]]은 후에 [[930년]] [[고창 전투]]에서 승리하여[[후백제]]군과 싸워서 대승을 거두어 전세를 뒤엎는다뒤엎으면서 완전히 역전되었다.
 
이후공산 전투 이후에 태조는 목숨을 바쳐 자신을 구해낸 신숭겸의 시신을 찾아내어 통곡하며, 광해주 비방동(현, 춘천시 비방동)에 예장한 다음 직접 제례를 지내고 그 자리에 순절단(殉節壇)을 모시고 대구지방에 지묘사(智妙寺)라는 절을 지어 공의 명복을 빌게 하였고, 세개의 봉분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1120년(예종15)에 신숭겸과 감락장군을 추모하는 도이장가(悼二將歌)라는 향가를 지어 찬양케 하였다. 현재 곡성의 덕양서원과 용산재, 대구의 표충사, 춘천의 도포서원(道浦書院), 평산의 태백산성사(太白山城祠), 동양서원 등에 배향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