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 정교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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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Sabinin. Glory of Iveria.jpg|thumb|left|"[[이베리아]]의 영광", [[미하일 사비닌]] 작의 조지아 정교회의 전승을이 표현된 잘 알려진 성화상" ]]소비에트 통치 하에 조지아의 교회는 러시아 정교회의 양상을 띄었다. : [[1917년]]에는 조지아에 2,455곳의 교회가 세워졌었는데, [[1980년대]] 중반 쯤에는 80곳만 교회의 역할을 하고 있었고, 4~5 곳의 수도원과 신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조지아의 교회는 신학교와 국제 정책들에 있어서 모스크바의 총대주교를 따르도록 강요 받았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소비에트 연방]]의 제도 개혁과 [[일리아 2세]] 총대주교의 강력한 리더쉽은 조지아 교회의 생명에 있어서 새 시대를 열게 했다. 많은 교회들이 다시 문을 열었으며, [[1988년]] 10월 1일에 조지아 정교회 [[신학교]]가 150명의 신학,신학과 기독교 인간학, 기독교 예술의 분야들을 전공하는 학생들과 함께 수도 트빌리시에 정식으로 개교 되었다. 지금은 갈라티에 두번째 신학교가 있고 나라 주변으로 6곳의 신학교가 있으며, 뿐만아니라 평신도 육성을 위한 시설도 있다. 각각의 교구들은 교리 교사들의 교육을 위한 중심부서가 구성되어 있고, 나라의 재복음화를 위한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다.
 
[[1990년]] 3월 4일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큐메니컬 총대주교]]는 조지아의 교회에 자립 교단의 지위를 부여했고 그 지위는 교단의 총대주교의 임명으로 명확해졌다. 조지아 교회의 자치권은 얼마간은 모스크바와 콘스탄티노플 간에 논쟁이 되었다. : 에큐메니컬 총대주교는 모스크바가 자치권을 부여할수 있는 권한을 승인하지 않았고, 조지아의 교회는 계속 자치 교단으로 여겨졌다. 에큐메니컬 총대주교의 결정은 세계의 정교회 전체에 걸쳐 조지아 교회의 위치에 대한 질서를 세웠다.
 
조지아가 독립국이 된 다음에는 교회의 쇄신 절차를 더욱 강화했다. 성직자들의 수를 충분하게 늘리고, 수도원 생활을 재개하는 소명이 시작되고 있으며시작었으며, 새로운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다. 조지아 정교회에서 [[1992년]]에 세례를 받아 신자가 된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대통령은 교회가 새롭게 독립한 나라에 활동하기 시작한 증가된 역할을 상징했다. 1994년에 조지아 정교회와 조지아 정부는 공립 학교가 교회와 연계하여 정성 들인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종교 수업의 요청에 대한 협약을 체결했다. 정부의 지원으로삼위일체에 건설된봉헌된 커다란새로운 대성당이 성당은정부의 성 삼위일체에지원으로 전념한다건축되었다. 1996년 3월에 총대주교 [[일리아 2세]]에 의해 초석이 되어 교회는 2004년 11월에 봉헌되었다.
 
[[1995년]] 11월에, 성직자는 물론이고 사무원 및 [[평신도]] 대표까지도 참석한 조지아 정교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교회의 사목과 영적인 쇄신을 수양하는 여러 결정들을 했고. [[딥틱]]에 대한 조지아 교회의 입장을 투명히 것을 요청했고, 다섯 [[성인 (종교)|성인]]의 시성 운동 또한 진행되었다. [[에큐메니즘]]은 조지아 교회에서 매우 민감한 화제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인도]]를 거쳐 [[로마]]로 돌아가면서 1999년 11월 8~9일에 조지아 방문이 가능했다. 교황은 셰바르드나제 대통령과의 대담했고, 일리아 총대주교와 정교회 최고 회의를 수용했으며, 전례 보편화의 뜻을 전했으며, 트빌리시 스포츠 스타디움에서 대중을 축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3년 9월에 조지아 정부와 [[바티칸]]과의 나라에서 가톨릭 교회의 위치를 조정하기 위해 제안된 협약은, 조지아 정교회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마지막 순간에는 실패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