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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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 세계 ==
=== 신의론(新意論) ===
이규보는 당대 큰 문장가이던 이인로와는 정반대의 문학관을 갖고 있었는데, 이인로의 용사론이 과거의 고전에서 좋은 구절을 응용하여 시를 짓자는 의견인 반면 이규보는 자신의 개성을 발휘하여 시인 자신의 목소리로 독창적인 표현을 써야한다는 신의론을 주장했다. 때문에 이규보의 작품에는 기존 한시에서는 쓰지 않았던 매우 독창적이면서도 그 표현이 탁월한 명구절들이 많다. 그의 대표시 <[[미인원]]>은 그의 기발한 시적 세계를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지금 입장에서 보아도 매우 파격적인 회문시(回文詩, 앞에서 뒤로 또는 뒤에서 앞으로 읽어도 의미가 통하는 한시)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 사륜정(四輪亭) ===
이규보의 독창적이면서 기발한 면모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사륜정인데, 이것은 네 발 바퀴가 달려있고 가벼운 대나무로 만든 정자로서 기존에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 했던 기발한 것을 발명해 내는 그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이규보의 사륜정 실물은 경기도 양평군 석창원에 있다.
 
=== 민족혼을 깨우는 시 ===
이규보는 개성 천마산 은거 시절, 고구려의 계승 국가 고려의 정통성을 세우고 고려인의 단결을 이끌어내려는 목적으로 <[[동명왕편]]>을 지었다. 이것은 당시 무인 집권에서 생긴 혼란과, 또 백제, 신라 부흥 운동으로 고려의 정통성마저 부정하는 상황 속에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정통 민족 국가임을 내세우기 위하려는 의도에서 쓰여졌다고 평가받는다. <동명왕편>은 이후 이승휴의 <[[제왕운기]]>, 조선 초기의 태조 이성계의 업적을 찬양한 <[[용비어천가]]> 창작에도 영향을 끼쳐 민족 서사시의 정통을 최초로 수립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 [[가전체 문학]] ===
그는 시 외에 여러편의 서사 문학 작품을 남겼는데, 대표적으로 술을 주인공으로 한 <[[국선생전]]>이 있다. 가전체 문학은 고대 설화와 근대의 서사 문학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는데, 시뿐만 아니라 한국 서사 문학에서도 그의 업적은 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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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유년 청년 시절 ===
[[1168년]]에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한다. 하지만 그의 흔적이 여주에 거의 남아있지 않고, 정확한 기록이 없어 그가 여주에서 출생한 것을 단정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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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9년]]([[고려 신종|신종]] 2) 동경([[경주시|경주]])에 반란이 일어나자 자원 종군하여 병마녹사(兵馬綠事) 겸 수제(修製)가 되었다.
 
=== 중년 ===
 
[[1207년]]([[고려 희종|희종]] 3) [[최충헌]](崔忠獻)의 명으로 〈모정기〉(茅亭記)를 쓰고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에 임명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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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년]]([[고려 고종|고종]] 6) 지방관의 죄를 눈감았다는 이유로 현재의 [[인천시]] [[계양구]] 지역인 안남 지역의 계양도호부부사(桂陽都護府副使)로 좌천되었다. 여기서 [[계양산]] 산자락에 있는 정자 자오당의 이름을 딴 자오당기 등을 남겼다.
 
=== 말년 = ==
[[1230년]]([[고려 고종|고종]] 17)에 잠시 위도(蝟島)에 귀양 갔다가 다시 기용되어 집현전 대학사·정당문학·태자소부·참지정사를 거쳐 [[1237년]](고종 24)에는 문하시랑평장사로 관계에서 사퇴했다. 또 대몽항쟁 시기에는 몽고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관리로도 활동했다. 말년에 그는 피난 수도가 된 강화도의 [[학당]]에서 후학들을 가르쳤고, 인천 강화도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