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안토니우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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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StAnthony.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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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 콥트교의 이콘, 왼쪽에 [[테베의 파올로파울로스]]와 함께 있는 안토니우스가 묘사되어 있다.
|출생지 = [[이집트]], [[헤라클레오폴리스 마그나]]
|사망지 = [[이집트]], 콜짐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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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주의]]의 교부"라는 명칭은 이미 [[이집트]]의 사막에서 실행되고 있던 [[기독교 수도원주의]]로 오인된다. [[금욕주의]]는 도시들의 변두리들에 있는 고립된 장소들에서 은거하는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문명과 완전히 단절된 채, 순전히 사막에서 생활하려 한 최초의 [[금욕주의|금욕주의]]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은수자]]적인 생활방식은 그의 선배들보다 현저히 더 엄격했다. 2세기 경에 [[테클라|성 테클라]]와 같은 유명한 그리스도교 금욕주의자도 있었다. 성 안토니우스는 그러한 전통을 따르기로 결정했고, [[리비아 사막|서부 사막]]의 끝자락에 있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서쪽으로 약 95 킬로미터(58 마일) 거리에 있는, ([[니트리아 (수도원 부지)|니트리아]]와 [[켈리아]] 그리고 [[스케티스]] 수도원들의 소재지가 된) 알칼리성의 [[니트리아 사막]] 지역으로 향했다. 그는 거기서 13년을 지냈다.<ref name="Butler's"/>
 
1세기에 그리스의 유대인 철학자 [[필론|알렉산드리아의 필론]]에 의해 이교도의 금욕주의 은수자들로 느슨하게 조직된 [[케노비테]] 공동체들로 묘사된 [[테라페우태테라페우테|테라페우태파테라페우테파]]가 알렉산드리아 근교의 [[마리우트 호수]]에서의 혹독한 환경에서 그리고 접근하기 어려운 다른 지역들에서 수립되었다는 사실 또한 주목할 만 하다. 필론은 "그리스와 계층의야만족의 사람들은국가들 아주모두의 좋은여러 것이면곳들에서 무엇이든만날 즐기기를수도 원하는있는 그리스와 야만족의부류의 국가들사람들은 모두의아주 여러좋은 곳들에서것이면 만날무엇이든 수도즐기기를 있음원한다."는 것을 알았다.<ref>Philo,''De vita contemplativa''</ref>
 
아타나시우스에 따르면, 악마가 지루함과 게으름, 여성의 혼령으로 괴롭히며 성 안토니우스와 싸웠는데, 이 성인은 기도의 힘으로 극복했다고 한다. (그러함은 [[기독교 미술]]의 주제를 제공한다.) 그 이후에, 그는 그가 살았고 그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는 지역 주민들에게 의지하는 자신의 문을 닫은 곳의 한 무덤으로 갔다. 악마가 그의 금욕주의와 열렬한 예배를 알았을 때, 그 악마는 그를 시기하여 폭행하였고, 의식을 잃은 그를 떠났다. 지역의 마을에서 그의 친구가 그를 만나러 와서 그의 그런 상태를 보고는, 그를 한 교회로 이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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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Piero di Cosimo 025.jpg|thumb|성 안토니우스의 그림, [[피에로 디 코시모]]가 그린 ''[[성 니콜라우스]]와 아빠스 안토니우스의 방문''의 일부, 1480년경 작품.]]
 
아타나시우스에 따르면, 성 안토니우스가 그에게 "나가서 보아라."라고 말하는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나가서 거룩한 에스케엠([[체발]] 또는 [[스케마 (정교회)|스케마]])와 닮았고 머리에는 두건을 썼으며, 십자가가 있는 허리띠를 맨 한 천사를 보았다고 한다. 그는 앉아서 종려잎을 땋다가, 일어서서 기도하고 다시 앉아서 그것을 땋다. 한 음성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안토니우스여, 그것을 하고 너는 쉬게 될 것이다." 그 후에, 그는 그가 본 튜닉을 입기 시작했고, 종려 잎이 엮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성 안토니우스는 교회에 그리고 이교도의 지배로 인해 발생할, 교회가 승리하고 형식적인 영광이 돌아올, 그리고 이 시대의 끝에서의 박해에 대해서 예언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마카리우스|성 마카리우스]]가 안토니우스를 찾아왔을 때, 성 안토니우스는 그에게 수사 복장을 입혀주었고 그의 일을 예언했다. [[테베스의테베의 파올로|최초의 은수자 성 파올로]]가 사막에서 떠날 날이 가까워 오자, 성 안토니우스는 그에게로 갔고, 그가 죽자, 20 번째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인 [[아타나시우스|사도좌의 아타나시우스]]에게 선물받았던 튜닉을 입힌 후에, 그를 묻었다.<ref name="Butler's"/>
 
338년에, 그는 [[아리우스]]의 가르침을 논박하는데 도움이 되기위하여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소환되었다.<ref name="Butl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