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의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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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im uikyum sindovi.jpg|thumb|right|250px|심의겸의 [[신도비]]]]
'''심의겸'''(沈義謙, [[1535년]] ~ [[1587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척신이다. [[영의정]] [[심연원]]의 손자이고, [[좌의정]] [[심통원]]의 종손이다. [[조선 명종|명종김효원]]과의 [[인순왕후]]의 친 남동생이었으나알력으로 [[사림동인]]인사들과 두루 사귀었으며, [[1563년서인]]에는 외척으로분당의 전횡을원인이 부리던 자신의되었다. 외삼촌국구 [[이량심강]] 탄핵하여 퇴출시키기도 했다. 그러나아들로 [[김효원이황]]과의 알력으로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동인조선 명종|명종]], [[서인인순왕후]]의 분당의 원인이남동생이었으나 되기도[[사림]]인사들과 했다.두루 자(字)는 방숙(方叔), 호는 손암(巽菴), 간암(艮菴), 황재(黃齋)이고, 봉군호(封君號)는 청양군(靑陽君)이며, 본관은 청송(靑松)이다사귀었다.
 
[[1563년]]에는 외척으로 전횡을 부리던 자신의 외삼촌 [[이량]]을 탄핵하여 퇴출시키기도 했다. [[이황]]의 문인임에도 [[이이]], [[성혼]]과 어울린 탓에 자연스럽게 [[서인]]이 되었다. 그뒤 [[심통원]]을 탄핵한 [[이이]]와 사감을 갖지 않고 계속 친하게 지냈다. [[김효원]]이 한때 [[윤원형]]의 식객이었던 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져 [[을해당론]]의 빌미를 제공한다. 자(字)는 방숙(方叔), 호는 손암(巽菴), 간암(艮菴), 황재(黃齋)이고, 봉군호(封君號)는 청양군(靑陽君)이며,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 생애 ==
=== 가계 ===
세종의 국구인 심온의 6대손이며, [[조선 명종|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연원]](沈連源)의 손자이고, [[조선 명종|명종]]의 국구 영[[돈녕부]]사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綱)의 차남으로, [[인순왕후]]([[조선 명종|명종]]의 비)의 동생이며, [[조선 선조|선조]] 때, [[병조판서]]를 지낸 청림군(靑林君) [[심충겸]](沈忠謙)의 형이다. 또한, [[조선 선조|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尹斗壽)와 사돈지간이었으며, [[조선 인조|인조]]의 아버지 [[조선 원종|원종]]의 국구인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 구사맹(具思孟)과도 사돈지간이었다.
 
== 생애 ==
=== 가계 배경 ===
[[파일:광평대군 신도비 01.jpg|thumb|right|250px|[[광평대군]]의 [[신도비]]<br>(심의겸 작)]]
[[파일:Shhim uikyum's Chinpil.jpg|thumb|left|180px|심의겸의 친필 서한]]
 
세종의 국구인 심온의 6대손이며, [[조선 명종|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연원]](沈連源)의 손자이고, [[조선 명종|명종]]의 국구 영[[돈녕부]]사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 [[심강]](沈綱)의 차남으로, [[인순왕후]]([[조선 명종|명종]]의 비)의 동생이며, [[조선 선조|선조]] 때, [[병조판서]]를 지낸 청림군(靑林君) [[심충겸]](沈忠謙)의 형이다. 또한, [[조선 선조|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尹斗壽)와 사돈지간이었으며, [[조선 인조|인조]]의 아버지 [[조선 원종|원종]]의 국구인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 구사맹(具思孟)과도 사돈지간이었다.
 
퇴계 [[이황]]의 제자로 수학하였으나 뒤에 [[이이]], [[성혼]]과 어울린 탓에 자연스럽게 [[서인]]이 되었다.
 
=== 관력 ===
퇴계 [[이황]]의 제자로, [[조선 명종|명종]]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 이조좌랑, [[홍문관]] 부수찬, [[홍문관]] 교리, [[홍문관]] 수찬, 병조정랑, [[사헌부]] 지평 등을 지내고,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를 하였다. [[1563년]]에는 외척으로 전횡을 부리던 자신의 외삼촌 [[이량]]을 탄핵하여 퇴출시키기도 했다. 후에,

[[성균관]] 전적, [[의정부]] 검상, [[의정부]] 사인, [[사간원]] 사간, 사복시 정, [[홍문관]] 부응교, [[홍문관]] 응교, [[사헌부]] 집의, [[홍문관]] 직제학, [[군기시]] 정, [[승정원]] 동부승지, [[승정원]] 우부승지, 이조참의를 지냈다. [[선조]] 때, [[승정원]] 우승지,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1573년]] 다시 이조참의가 되었을 때,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임명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때 [[김효원]]이 [[윤원형]] 집의 식객이었던 점과,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과 친하게 지내며 그의 집에 수시로 출입한 것을 문제삼아 집요하게 공격했다.

그러나 [[김효원]]은 매장당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동생이자 출계한 [[심충겸]]의 전랑 임용을 방해했다. 이후 알력이 커져 동서분당의 원인을 제공한다.
이후, [[사헌부]] [[대사헌]], 형조참판, 병조참판, [[병조판서]]에 이르렀으나, [[1574년]] [[대사헌]], [[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좌천되었다. [[1575년]] [[동서분당]]이 발생하자, [[서인]]의 [[영수]]로 지목되어, [[개성부]] 유수, [[전라도]] [[관찰사]], [[함경도]] [[관찰사]], [[전주]] [[부윤]] 등 외직을 전전하다가, 다시, 내직(경직)으로 옮겨, 예조참판이 되고, 청양군(靑陽君)에 습봉되었다. 그러나, [[1584년]] 심의겸을 변호하던 율곡 [[이이]]가 죽자, 파직되어, [[파주]]로 낙향해 살다가, [[1587년]] 별세하였다.
 
=== 생애 후반 ===
척신 출신이지만 구세력을 대표하는 인물로 [[사림]]들간에 명망이 높았다. [[명종]] 때, 외숙부 [[이량]]이 사림들을 탄핵할때, 반대로 외숙부 이량을 탄핵하여 축출시키기도 하였다.
[[1573년]] 심의겸이 이조참의로 있을 때, [[김종직]] 계통의 신진 세력으로서 [[김효원 (성암)|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천거되자, 그가 일찍이 권신이었던 [[윤원형]]의 집에서 묵었던 사실을 들어, 권력가에 아부했다 하여 반대하였다. 그러나, [[1574년]] 결국, 김효원은 이조정랑이 되었고, [[1575년]] 심의겸의 동생인 [[심충겸]]이 후임 이조정랑에 추천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반대함으로써 두 사람은 서로 대립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구세력은 심의겸을 중심으로 [[서인]]이라 했으며, 신진 세력은 김효원을 중심으로 [[동인 (정치)|동인]]이라 하였다. 그 후 당쟁이 커질 것을 염려한 율곡 [[이이]]의 조정으로 개성부 유수, 전라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이후
, 함경도 관찰사, 전주 부윤, 예조참판이 되었으나, [[1584년]] 이이가 죽은 후 동인이 득세하고 서인이 몰락하자 파직당하였다.

[[1584년]] 심의겸을 변호하던 율곡 [[이이]]가 죽자, 파직되어, [[파주]]로 낙향해 살다가, [[1587년]] 별세하였다.

== 사후 ==
그의 날카롭고 비타협적인 성격은 당쟁의 실마리를 만들어 조선 왕조의 치명적인 적폐의 요인이 되게 하였다. 김우옹은 선조에게 심의겸과 김효원은 본래 붕당을 꺼려했으나, 그들의 주변 사람들이 파당을 만들어 붕당이 더욱 심해진 것이라고 상소하였으나, 선조는 심의겸을 붕당의 원흉으로 지목하였다.
 
== 작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