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의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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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의 제자로 수학하였으나 뒤에 [[이이]], [[성혼]]과 어울린 탓에 자연스럽게 [[서인]]이 되었다.
 
1555년(명종 10) 진사가 되고 1562년 [[조선 명종|명종]] 때,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 관력 ===
과거[[조선 급제명종|명종]] 직후때, 권지를별시[[문과]]에 거쳐 1563년 병조좌랑(兵曹佐郞)을 거치고 정언(正言)·부수찬(副修撰)·교리(校理) 등을 역임하였다. 그뒤급제하여,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 이조좌랑, [[홍문관]] 부수찬, [[홍문관]] 교리, [[홍문관]] 수찬, 병조정랑, [[사헌부]] 지평 등을 지내고, [[호당]]에 뽑혀, [[사가독서]]를 하였다. [[1563년]]에는 외척으로 전횡을 부리던 자신의 외삼촌 [[이량]]을 탄핵하여 퇴출시키기도 했다.
 
명종이 윤원형을 견제하기 위해 심의겸의 외숙(외삼촌)인 이량(李樑)을 등용하였으나 지나친 권력욕으로 자신이 세력을 키우고 강직한 신하였던 이준경을 몰아내기 위해 골몰하였다. 또, [[이량]]이 [[이조판서]]였으므로 그 아들 [[이정빈]]이 상피제에 의해 갈리면서 친구인 [[유영길]]을 후임으로 추천했으나 [[윤근수]], [[윤두수]], [[허엽]], [[이문형]] 등이 이를 반대하였다. 이에 외숙 [[이량]]이 [[이감]]을 사주하여 이들 사림(士林)들을 숙청하려고 하였다. 이때 이것을 막으려 노력하였다. 그는 [[이량]]의 측근이던 [[홍문관]]부제학 [[기대항]]을 설득시켜 [[이량]] 일파의 음모를 폭로하게 하였다.
 
당시 집안의 사람을 탄핵하는 것은 이례적인 것이었고 이일로 심의겸은 곧은 선비로 칭찬을 듣고 명망을 쌓았다. 1564년 호당(湖堂)으로 사가독서에 들었고, 이후 사헌부지평(持平)
 
[[성균관]] 전적, [[의정부]] 검상(檢詳), [[의정부]] 사인(舍人), 1565년 [[사간원]] 사간(司諫), 부응교(副應敎), 사복시 정, [[홍문관]] 부응교, 1566년 집의(執義)·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홍문관]] 응교, [[사헌부]] 집의, [[홍문관]] 직제학, [[군기시]] 정, [[승정원]] 동부승지, [[승정원]] 우부승지, 이조참의를 지냈다. [[선조]] 때, [[승정원]] 우승지,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1573년]] 다시 이조참의가 되었을 때,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임명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때 [[김효원]]이 [[윤원형]] 집의 식객이었던 점과, [[윤원형]]의 사위 [[이조민]]과 친하게 지내며 그의 집에 수시로 출입한 것을 문제삼아 집요하게 공격했다.
 
그러나 [[김효원]]은 매장당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동생이자 출계한 [[심충겸]]의 전랑 임용을 방해했다. 이후 알력이 커져 동서분당의 원인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