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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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제1고보(현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교]]) 법문학부 영문과를 졸업하고, [[1928년]]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단편 《[[도시와 유령]]》이 발표됨으로써 [[동반자작가]](同伴者作家)로 데뷔하였다. 계속해서 《[[행진곡 (이효석 단편소설)|행진곡(行進曲)]]》, 《[[기우 (이효석 단편소설)|기우(奇遇)]]》 등을 발표하면서 동반작가를 청산하고 [[구인회]](九人會)에 참여, 《[[돈 (이효석 단편소설)|돈(豚)]]》, 《[[수탉 (이효석 단편소설)|수탉]]》 등 향토색이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가 된 후 《[[산 (이효석 단편소설)|산]]》, 《[[들 (이효석 단편소설)|들]]》 등 자연과의 교감을 수필적인 필체로 유려하게 묘사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1936년]]에는 1930년대 조선 시골 사회를 아름답게 묘사한 《[[모밀꽃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정작 이효석의 삶은 시골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양 영화를 즐겨 보았고, 서양에서 온 가수나 무용단의 공연을 보며 넋을 잃기도 했던 도시인의 삶이 그의 삶이었다. 그 후 서구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장미 병들다]]》, [[동성애]]를 다룬 작품으로 평가받는《[[화분 (이효석 단편소설)|화분(花粉)]]》 등을 계속 발표하여 성(性) 본능과 개방을 추구한 새로운 작품 경향으로 주목을 끌기도 하였다. 당시 [[이태준]]·[[박태원]] 등과 더불어 대표적인 단편작가로 평가되었다.
 
[[1940년]] 부인 이경원과 차녀를 잃은 후 실의에 빠져 건강을 해치고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못하다가, [[1942년]] [[뇌척수막염]]으로 숨을 거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