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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12월 1일]] 일본 야전포병 제1연대에서 6개월 동안 견습사관으로 복무하던 도중 그의 숙부인 한성부 경무사 권형진(權瀅鎭)이 [[을미사변]]에 대한 책임으로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귀국한 뒤 사형당하면서 일본 정부로부터 정식 임관을 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그는 한동안 일본에 계속 체류했고 [[1901년]] [[7월 17일]]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러일 전쟁]] 중이던 [[1904년]] 11월부터 1905년까지 [[함경도]] 지역에서 일본군 후비 제2사단 소속으로 복무하는 동안 통역과 병참 업무를 맡는 한편 경성군과[[경성군]]과 [[회령군]], 수성군에서[[수성군]] 일대에서 병참 및 첩보 활동을 펼쳤다. [[1905년]] [[8월 15일]] 대한제국 육군 포병 참위로 임명되었고 1905년 [[12월 14일]] 육군 포병중대, [[1906년]] [[6월 12일]] 육군 포병 부위, 1906년 [[10월 18일]] 육군 포병 정위로 진급했다. 1905년 [[12월 5일]] 육군 무관학교 학도대 소속으로 근무했고 1906년 10월 육군 유년학교 학도대장으로 임명되었다.
 
[[1908년]] 11월 러일 전쟁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훈6등 단광욱일장(單光旭日章)을 받았으며 [[1910년]] [[8월 29일]] [[조선주차군사령부]] 헌병대 사령부에 배속된 뒤부터 [[1929년]] 3월 사망할 때까지 일본군 장교로 복무했다. [[1912년]] [[8월 1일]]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 병합 기념장을 받았고 [[1920년]] 4월 훈5등 서보장, [[1927년]]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 1929년 3월 육군 포병 대좌로 진급했으며 사후 일본 정부로부터 정5위에 추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