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만 (1893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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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10월 20일]]부터 [[10월 21일]]까지 열린 전만조선인민회연합회 창립대회에서 장춘 대표 의원으로 참석했으며 [[1933년]] 6월 만몽일보사 창립위원을 역임했다. 1933년 8월 《만몽일보》 주필을 역임했고 [[1934년]] 만주국 건국공로장을 받았다.
 
[[1935년]] 6월 만몽일보사 사장으로 임명되었고 [[1936년]] 《만몽일보》 편집장을 지냈다. [[1939년]] 12월부터 [[1941년]]까지 [[만주국 협화회]] 수도계림분회 부회장을 역임하는 동안 조선인에게 일본 제국의 신민으로서의 자각을 강조하고 협화 운동에 동참할 것을 주장하는 등 일본의 재만 조선인 통제 정책에 적극 협력했다. [[1940년]] 9월 조선인교육후원회 신경(新京, 신징) 지역 상무위원으로 임명된 뒤부터 일본의일제의 황민화 교육 정책 시행에 적극 협력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해외 부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