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톨트 브레히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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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톨트 브레히트'''({{llang|de|Bertolt Brecht}}, [[1898년]] [[2월 10일]] -~ [[1956년]] [[8월 14일]])는 [[20세기]]에 활동한 [[독일]]의 [[연극|극작가]], [[시인]], 그리고 [[연출가]]다. 주로 [[사회주의]]적인 작품을 연출했으며, [[소격효과]]라는 개념을 연극연출에 사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표현주의를 거친 신즉물주의적(新卽物主義的) 스타일로, 현실에 대한 가차 없는 비판과 풍자를 극화한 니힐리스트. 후에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 생애 ==
독일 [[바이에른 주]]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제지공장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뮌헨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 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동안은 [[뮌헨]]에 있는 병원에서 잠시 일했다.
독일 [[바이에른 주]]에서 아우크스부르크의 제지소장의 아들로 태어나 [[의학]]을 공부 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동안은 [[뮌헨]]에 있는 병원에서 잠시 일했다. 1928년 연극 《서푼짜리 오페라》로 유명한 작가가 되었는데, 무려 100회가 넘는 공연이 [[베를린]]에서 있었다. 초기에는 [[무정부주의자]]였으나, 나중에는 전쟁체험을 통해서 자기의 계급에 등을 돌려 차츰 혁명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브레히트는 [[부르주아]]의 탐욕을 드러내는 극본과 [[사회주의]] 소설 《서푼짜리 소설》을 집필하는 [[좌파]]작가로 활동했다. [[1933년]] 극우정당인 [[나치]]의 집권과 나치가 좌파탄압을 위해 날조한 사건인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으로 [[미국]]에 망명했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1947년]] [[12월]]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뜻하는 [[매카시즘]]때문에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으로 이주해야 했다. 당시 많은 동료 좌파작가들이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을 택했지만, 그만은 동독을 택했다. 하지만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동독 공산당]](SED) 간부들이 [[관료주의]]에 물들어 있던 동독도 그에게 만족을 주지는 못하여 풍자시를 쓰기도 했으며, 정부가 인민을 버렸다면서 1953년 동독 노동자 봉기 진압을 비판하기도 했다. [[1956년]] [[8월]] 지병인 [[심장병]]으로 숨을 거두었으며, 가족으로는 [[1929년]] 결혼한 아내 헬레네 바이겔과 두 자녀(슈테판, 바바라)가 있다.
 
전쟁이 끝난 뒤 뮌헨에서 극작가·연출가로 출발하여 후일 베를린으로 나가 [[막스 라인하르트]]의 [[독일 극장]]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처녀작 희곡 《바르》(1918)와 이어서 제2작 《밤의 북[鼓]》(1919)으로 [[클라이스트 상]]을 받았고, 《도시의 정글 속에서》(1923)와 《서푼짜리 오페라》(1928)로 극단에 결정적인 지위를 굳혔는데, 《서푼짜리 오페라》는 무려 100회가 넘는 공연이 [[베를린]]에서 있었다.
 
초기에는 [[무정부주의자]]였으나, 나중에는 전쟁체험을 통해서 자기의 계급에 등을 돌려 차츰 혁명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브레히트는 [[부르주아]]의 탐욕을 드러내는 극본과 [[사회주의]] 소설 《서푼짜리 소설》을 집필하는 [[좌파]]작가로 활동했다. [[1933년]] 극우정당인 [[나치]]의 집권과 나치가 좌파탄압을 위해 날조한 사건인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으로 [[미국]]에 망명했다. 망명 중에 집필한 《제3제국의 공포와 비참》, 《갈릴레이의 일생》(1938), 《배짱좋은 어머니와 그 아이들》(1939), 《코카서스 백묵의 동그라미》(1944) 등의 상연으로 새로운 연극의 길을 제시하였다.
 
독일 [[바이에른 주]]에서 아우크스부르크의 제지소장의 아들로 태어나 [[의학]]을 공부 했으며, [[제1차 세계 대전]]동안은 [[뮌헨]]에 있는 병원에서 잠시 일했다. 1928년 연극 《서푼짜리 오페라》로 유명한대전이 작가가끝난 되었는데, 무려 100회가 넘는 공연이 [[베를린]]에서 있었다. 초기에는 [[무정부주의자]]였으나, 나중에는 전쟁체험을 통해서 자기의 계급에 등을 돌려 차츰 혁명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브레히트는 [[부르주아]]의 탐욕을 드러내는 극본과 [[사회주의]] 소설 《서푼짜리 소설》을 집필하는 [[좌파]]작가로 활동했다. [[1933년]] 극우정당인 [[나치]]의 집권과 나치가 좌파탄압을 위해 날조한 사건인 [[독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으로 [[미국]]에 망명했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1947년]] [[12월]] 극단적인 [[반공주의]]를 뜻하는 [[매카시즘]]때문에이 불어 브레히트는 다시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으로 이주해야 했다. 당시 많은 동료 좌파작가들이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을 택했지만, 그만은 동독을 택했다. 하지만 [[독일 사회주의 통일당|동독 공산당]](SED) 간부들이 [[관료주의]]에 물들어 있던 동독도 그에게 만족을 주지는 못하여 풍자시를 쓰기도 했으며, 정부가 인민을 버렸다면서 1953년 동독 노동자 봉기 진압을 비판하기도 했다. [[1956년]] [[8월]] 지병인 [[심장병]]으로 숨을 거두었으며, 가족으로는 [[1929년]] 결혼한 아내 헬레네 바이겔과 두 자녀(슈테판, 바바라)가 있다.
 
== 주요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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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곡 ===
초기의브레히트는 희곡에는처음엔 [[표현주의]]적인 경향도작가로 남아출발하였으나 있었다후일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추구하게 되었다. 처녀작인 <바알>, 출세작이 된 귀환병극(歸還兵劇) <밤의 북>, 인간소외의 문제를 앞세운 <도시의 정글>에는 아직 안비바렌트한 도취나 익살, 조소의 빛이 강하지만 차츰 마르크스주의로 기울어져, 대상에의 거리적(距離的)인 태도는 사회적인 인식을 구하는 새로운 서사적 연극의 주요한 수법인 이화효과(異化效果)를 낳았다. <사나이는 사나이다> 그리고 실지교시(實地敎示)를 중시한 일련의 교육극의 시도는 이미 그러한 지향(志向)을 보인 것이다. 단순한 정감에 흐르지 않는 음악과 극의 새로운 종합을 구하는 방향은 작곡가 바일의 협력을 얻어 <싸구려 오페라>(1928)와 <마하고니시의 흥망>(1930)을 낳았다. <도살장의 성 요한나>와 <모친>은 정치적으로 가장 첨예한 극이다. 불우한 망명생활 중 그의 연극론은 차츰 체계화되었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걸작 <배짱 센 어머니와 그 아이들> <푼틸라 나리와 하인 마티> <세추안의 선인(善人)> <코카서스의 백묵원(白墨圓)> <갈릴레이의 생애> 등을 연달아 집필, 전후에는 동베를린으로 넘어가 베를리나 앙상블을 결성하고 실제의 연극활동을 통해서 그의 연극의 혁신적인 의의를 무대 위에서 입증하여 세계적인 주목을 모았으나 변증법적 연극으로 발전시키는 도상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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