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앙리에트 마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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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전의 시작 ===
[[1630년]]경 왕권과 신권의 충돌로 영국 정계가 점차 갈등에 빠져들면서 점차 늘어나는 헨리에타 마리아의 국정 참여는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헨리에타 마리아는 [[스페인]]과의 외교적 접근을 추구하였던 [[청교도]] 신하들을 매우 혐오하였고, 하원을 선점함으로서선점함으로써 그들에게 일격을 가했다. 청교도와 왕당파간의 내전이 시작되면서 헨리에타 마리아는 남편인 왕을 돕기 위해 여기저기 자금 원조를 요청하였으나, 그 대상이 로마 교황 [[교황 우르바노 8세|우르바노 8세]], 모국인 프랑스 왕실 등 로마 가톨릭계였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많은 영국인들의 분노를 샀을 뿐 아니라 [[찰스 1세]]의 평판에 악영향을 끼쳤다. 또한 같은 로마 가톨릭교도들에게 관심과 동정심이 많았던 헨리에타 마리아는 [[1638년]] [[예수회]] 수사였던 리처드 블런트가 죽자 심지어 자신의 개인 예배당인 [[서머싯 하우스]]에서 장례 [[미사]]를 치러 주기도 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1642년]] [[8월]], 분쟁이 시작되었을 때 헨리에타 마리아는 2월 경 영국을 떠나 유럽에 있었다.[[네덜란드]]를 시작으로 왕비는 유럽 대륙을 돌아다니며 원조금을 모았으나 [[1643년]] 초까지 영국에 입국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많은 무기와 군대로 무장한 뒤 결국 영국 동해안에 위치한 [[요크셔 주]] 블리들링턴에 상륙했고, 요크에 본부를 만든 뒤 남아있던 왕실 세력과 합류했다. 왕과 [[옥스퍼드]]에서 재회하기까지 그녀는 영국 북부에서 군인들과 함께 몇 달을 기다려야만 했다. 그러나 [[1644년]] [[4월]] 헨리에타 마리아가 출산을 위해 엑시터로 떠난 뒤 두 사람은 다시는 서로를 보지 못했다. [[영국성공회]]를 믿는 영국과는 달리, [[장로교]]를 믿는 [[스코틀랜드]] 의회의 개입과 그에 따른 엄격한 조항들을 왕이 강경하게 거부하면서 왕권의 붕괴가 확실시되자, 헨리에타 마리아는 [[1644년]] 7월 결국 자녀들과 함께 [[프랑스]]로 피신하였다. [[1649년]] [[찰스 1세]]가 처형당하고 영국에 공화정이 세워지자 왕관을 잃은 헨리에타 마리아와 그녀의 여러 자녀들은 프랑스 왕실의 푸대접 속에서 궁핍한 생활을 영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