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3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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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2년 7월 7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군주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사망하자 카트린느는 공석인 폴란드 국왕위에 앙리를 내세워 신성 로마 제국의 [[막시밀리안 2세]]의 아들 에른스트와 경쟁하여 폴란드 국왕에 선출되었으나 폴란드로 떠나는 것을 주저했다. 8월 24일 누이 동생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나바라 왕국]]의 국왕인 [[앙리 4세|앙리 드 부르봉]]과의 결혼식 첫날밤인 성 바를톨로메오 축일에 위그노들에 대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대학살|대학살]]이 일어나 [[가스파르 드 콜리니]] 제독을 비롯한 위그노 대부분이 카톨릭측으로부터 학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당시 앙리 3세는 폴란드 국왕위에 선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르톨로메오 대학살이 일어날 때까지 폴란드로 떠나지 않았으며 또한 바르톨로메오의 대학살 자체가 당시 샤를 9세와 가까이에 접근하려했던 신교도의 수뇌부중 한명이었던 콜리니 제독을 제거하기 위한 카트린느와 기즈 공작가의 결탁한 음모였고 앙리 3세가 다른 형제들을 제치고 모후인 카트린느의 총애를 받은 것을 볼때 그 역시 바르톨로메오 대학살에대학살의 전모를 간접적으로 알고 있거나 관여한 의혹을 받고 있다.
 
== 폴란드 국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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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앙리 3세는 프랑스 왕위에 오르면서 즉위전과 다른 모습들을 보여 주기 시작했다. 그는 지적이고 세련된 궁정인이었으나 왕위에 오르면서 미뇽이란 불린 총신들에 대한 지나친 총애, [[동성애]]적인 성적 취향과 조각배를 타고 손느(saone)강을 오르락 내리락하는 등의 기이한 행각과 사치등으로 비난을 받았고, 모친인 [[카트린느 드 메디치]]와 더불어 사악하고 간사한 인물로 인식되어 즉위 전부터 많은 이들로부터 무차별적인 미움을 받아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였고 프랑스를 다시 혼란으로 몰고 갔다.
 
=== 제 5차 위그노 전쟁 ===
앙리 3세가 왕위에 오른지 10일이 지나서 그의 동생 에르큘 프랑수아가 파리를 탈출 자신의 영지 내에 위치한 드뢰로 도망쳐 자신의 지지자를 모아 2일이 지난 후 신성동맹의 수장 앙리 드 기즈를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루이 드 부르봉의 아들이자 앙리 드 나바르의 사촌형제 [[앙리 드 부르봉]] 또한 파리에서 탈출해 살아남은 위그노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시작 위그노들의 반란이 재발하는 동시에 형제간의 골육상잔이 발생했다.
 
결국 1576년 블루아에서 소집된 삼부회에서 앙리 3세게 원조금을 내놓기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벌어졌고 2월 3일 파리에 억류되었던 신교도의 지도자이자 나바라 국왕이기도 한 앙리 드 나바라마저 파리를 탈출 나바라의 수도 베아른에서 다시 세력을 집결하기 시작했다. 결국 1577년 베르주라크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가톨릭]] 신앙은 독실했으나 즉위 후 가톨릭 세력의 영수인 [[앙리 드 기즈]]] 공작과의 불화가 심했을 뿐 아니라 그의 암살을 직접 주도하면서 가톨릭 당파로부터 강한 반발을 사 수도 [[파리]]에서 쫓겨났다.
 
이후 [[위그노 전쟁]] 때 처음에는 구교파와 손을 잡았으나, 후에 [[위그노]](신교) 파의 지도자 친척 [[앙리 4세|앙리 드 나바라]]와 동맹하여 [[파리 시|파리]]를 탈환하고자 하였으나, [[1589년]] 파리가 포위되자 가톨릭 수도사인 [[자크 클레맹]](Jacques Clément)에게 암살되었으며, 이로써 발루아 왕조는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