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트렐치나의 비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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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코의 부친은 아들이 카푸친 작은형제회에 입회할 수 있도록 사교육을 대기 위해 [[미국]]으로 일을 구하러 갔다. 바로 이 기간 동안인 1899년 9월 프란체스코는 [[견진성사]]를 받았다. 그는 과외수업을 통해 수도회 입회자격에 들 정도로 학문적 지식을 쌓아 통과하였다. 1903년 1월 6일 15세가 된 프란체스코는 모르코네의 카푸친 작은형제회에 수련자로 입회하였으며, 같은 달 22일에 수사복과 비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그의 수도명 비오는 피에트렐치나의 [[수호성인]] [[성 비오 5세]]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사제==
수도원에 들어간 비오는 사제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갔다.<ref name="ewtn1"/> 그로부터 3년 후인 1907년 1월 27일 비오 수사는 수련기를 마치고 종신서원을 하였다. 1910년 비오 수사는 베네벤토 대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로부터 4일 후 그는 천사들의 모후 성당에서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하였다. 하지만 얼마 안가 건강이 나빠져서 수도회로부터 특별히 허락을 받아 1916년 초엽까지는 요양을 위해 자택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같이 지냈다.
 
1916년 9월 4일 비오 신부는 수도원으로 돌아와 공동체 생활을 다시 시작하였다. 그는 포르지아 주 산조반니로톤도에 위치한 가르가노 산에 있는 은총의 성모 카푸친 작은형제회 수도원으로 이주하였는데, 당시 수도원에는 비오 신부를 포함하여 일곱 명의 수사가 있었다. 군복무 기간을 제외하고는 비오 신부는 이후 평생을 산조반니로톤도에서 보냈다.
 
[[파일:Don Bosco - S. Stanislao 07.JPG|thumb|[[로마]]에 있는 성 비오 신부 성상.]]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산조반니로톤도의 카푸친 작은형제회 수도원에서 네 명의 수사에게 징집령이 내려졌다. 당시 비오 신부는 가톨릭 신학교의 교수이자 영적 지도자로 있었다. 수사 한 명이 추가로 징집되자 자연스럽게 비오 신부가 수도원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1917년 8우러 비오 신부마저 징집령이 떨어져 소환되었다. 비록 건강 상태가 좋지는 않았지만, 이탈리아군 의무대대 100중대 4소대로 배치되었다. 10월 중순에 병세가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였지만, 1918년 3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병역 면제를 받았다. 군대에서 퇴소한 비오 신부는 수도원으로 돌아왔으며, 피에트렐치나에 있는 천사들의 모후 성당에서 사목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중에 비오 신부가 기적을 일으킴으로 해서 명성이 날로 높아져가자 수도회 장상은 그를 산조반니로톤도에 있는 수도원으로 다시 보냈다.비오 신부의 군복무는 총 182일간이었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