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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년]]부터 [[1905년]]까지 한학을 배웠으며 [[1907년]]부터 [[1909년]]까지 평안남도 중화군 사립충성(充成)학교에 재학했다. [[1910년]] 대한제국 궁내부 주사를 역임했다. [[1910년대]] 황해도 황주군 삼전면장을 역임했지만 [[1916년]] 만주 연길(延吉, 옌지)로 이주했으며 [[1920년]] 간도대한국민회 통신부장을 역임했다.
 
[[1922년]]부터 [[1934년]] [[5월 31일]]까지 간도 국자가(局子街) 조선인민회 회장을 역임하는 동안 일본의 재만 조선인 통제 정책에 협력했으며 [[1923년]] 간도교육협회, [[1924년]] 빈민수업소(貧民修業所)를 설치했다. [[1925년]] 국자가무역회사 취체역을 역임했으며 [[1931년]] [[9월 20일]] 국자가 일본인 민회 회장과 모략하여 이른바 국자가 방화 사건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만주 사변]] 당시 일본군의 간도 출병을 촉진시킨 계기가 되었다. 1931년 10월 7일 민생단 발기인 대표, [[1932년]] 연길현 자위단 조직에 참여하여참여하는 등 항일 세력 탄압에 적극 협력했으며 [[1934년]] [[4월 17일]]부터 [[1937년]] [[4월 16일]]까지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역임했다.
 
1934년 9월부터 [[간도협조회]] 본부 고문으로 활동하는 한편 만주식산주식회사 이사(1936년 10월 30일 ~ 1939년), 동만임업주식회사 사장(1938년 ~ 1943년), 동양지광사 이사(1939년 2월), 연길도시금융회 회장(1939년 10월)을 역임하는 등 48만원에 달하는 자본금을 보유할 정도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1934년 만주국 건국공로장 수여자로 상신되었으며 1935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시정 25주년 기념 표창을 받았다. [[1937년]] 4월 16일 정7위에 서위되었으며 [[1940년]] [[11월 25일]] 만주국 정부로부터 건국신묘 창건 기념장을 받았다. [[만주국 협화회]] 간도성(間島省, 젠다오 성) 본부 위원(1939년 9월 ~ 1940년)과 조선인교육후원회 연길(延吉, 옌지)지역 위원(1940년 8월 16일 선임), 만주국 협화회 중앙본부 위원(1943년 전후)을 역임했으며 [[1943년]] 2월 간도성 결전황민단기성회 결성을 추진했다.
 
[[만주국 협화회]] 간도성(間島省, 젠다오 성) 본부 위원(1939년 9월 ~ 1940년)과 조선인교육후원회 연길(延吉, 옌지)지역 위원(1940년 8월 16일 선임), 만주국 협화회 중앙본부 위원(1943년 전후)을 역임했으며 [[1943년]] 2월 간도성 결전황민단기성회 결성을 추진했다. 광복 이후인 [[1949년]] [[3월 25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지만 나중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친일파 708인 명단]]의 중추원 부문,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중추원 부문과 해외 부문,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 참고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