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훅: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Goldsky92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Wjdghalf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117번째 줄:
 
=== 훅에 대한 묘사 ===
 
훅에 대한 묘사는 여러 가지 측면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대부분의 과학사 책들은 타고난 실험 과학자였고, 하루에 3,4시간 밖에는 자지 않고 깨어 있는 동안에는 항상 실험 장치들을 주물럭거리고 수많은 실험을 수행하여 매우 폭이 넓고 다양한 이론들을 만들며 일생을 보낸 건강하지는 않았지만, 창의적인 과학자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약간 조급한 성격이어서 자기의 창의적 생각들을 깊이 있게 완성시키지 못했고 남들의 비난을 참지 못햇으며 논쟁도 잘 견디지 못했다고 한다.<ref name="S과학사"></ref>
하지만 이와 다르게, 훅과 함께했던 [[존 오브리]]는 1680년에 훅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고 한다.
줄 123 ⟶ 122:
{{인용문|“중간 정도의 키에 약간 구부정하고, 얼굴은 창백했으며, 얼굴 아래쪽은 작았지만 머리는 컸다. 눈은 부리부리하며 앞으로 튀어나왔고, 원기가 없었다. 그리고 회색을 띠고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은 갈색으로 가늘었으며 촉촉했고, 고수머리였다. 그는 한결같이 온화했으며, 과식을 하지 않고 항상 적절한 양으로 식사를 했다. 비범한 창조적 두뇌의 소유자였던 만큼, 그는 높은 미덕과 친절함을 지닌 사람이었다.”}}
<ref name="G과학사"></ref>
 
=== 로버트 훅의 과학철학적 사상 - 과학과 기술의 관계 ===
훅의 접근법들은 기존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중세의 자연철학적에서 현대적인 시각으로의 과학으로 가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실험들은 여러 분야에서 최초인 것들도 있으며 다양한 실험 기구들을 고안해 내기도 한다. 훅은 기술은 과학 없이 진보될 수 있어도 과학은 기술없이는 진보되지 못한다고 생각을 하였으며 좀 더 정확한 기구(예를 들자면 측정에 있어 더 정밀한 기구 등)를 만들어 내는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그에 그의따라서 노력은만들어진 여러것이 측정기구를기상학에 보완하기도영향을 하였다미친 기압계, 그리고 보일의 법칙의 발견에 영향을 미친 진공펌프의 발명 등이 있다.
<ref name="BBC로버트훅"></ref>
 
== 과학에 대한 기여 ==
줄 133 ⟶ 136:
 
==== 현미경의 개량 ====
로버트 훅은 마리크로그라피아마이크로그라피아(Micrographia)와 관련하여 현미경을 개량하기도 하였다. 그는 현재의 [[광학 현미경과현미경]]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현미경을[[현미경]]을 잘 만들었다. 그는 눈과 접안렌즈의[[접안렌즈]]의 일정한 거리 유지를 위해 눈을 갖다댈 수 있는 부분을 만들었다. 또한 경통을[[경통]]을 분리하고 기울어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경통에 중간렌즈를 넣었는데 이는 색과 모양이 일그러지는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가 개발한 시스템이 바로 빛을 조절하는 [[조리개]]로 그것을 통해 빛을 조정하였다. 뿐만 아니라 물이 담긴 플라스크를 이용하여 램프에 빛을 모았다고 한다.
<ref name="S과학사"></ref>
 
=== 광학 ===
로버트 훅은 아이러니하게도 흔히 [[뉴턴의 고리라고고리]]라고 불리는 것을 발견해 낸 사람이다. 훅은 얇은 물질막이 만들어내는 색의 패턴들의 성질을 연구하였고, 그런 현상은 두 개의 층에서 반사된 빛 사이에서 발생하는 간섭 때문에 일어난다고 주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훅은 두 장의 유리판을 약간의 각도를 유지하여 접근시키면서 빛이 색을 띤 둥근 고리모양을 이루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현상은 '“뉴턴의 고리”'라고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것은 뉴턴이 역사 다시 쓰기에 얼마나 성공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하다. 빛에 대한 훅의 관점은 호이헨스의 압축파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상하로 진동하는 파동이라고 주장했다.<ref name="G과학사"></ref>
하지만, 훅은 [[데카르트]], 호이겐스와[[하위헌스]]와 같이 물체 내 입자들의 연속적인 진동을 통해 빛이 전달된다는 개념을 기초로 빛의 굴절을 해석하고해석하였고, 그 결과, 잘못된 결론에 도달하였다.
<ref name="R과학사"></ref>
 
=== 천문학 ===
천문학이야말로[[천문학]]이야말로 로버트 훅이 다른 모든 학문보다 더 길게 연구하였던 학문이다. 그는 그레샴 대학교의 그의 사무실에 망원경을 설치하기도 하였으며 그가 건축가로서[[건축가]]로서 가장 활발했을 때 역시 천문학적인 관찰과 함께였다.
==== 망원경에 관한 연구 ====
로버트 훅은 망원경을 제작하는데 힘썼으며 물체를 직접 보는데 연관되는 렌즈의 크기를 조정함으로 들어오는 빛을 극대화 시킬 수 있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그 과정에서 아이리스조리개와 비슷한 것을 발명해 내기도 한다.
줄 171 ⟶ 175:
=== 물리학 ===
==== 훅의 법칙 ====
[[파일:Hooke's Law wikipedia.png |250px|thumb|[[훅의 법칙]]]]
훅의 법칙은 고체에 힘을 가해 변형시킬 때, 힘이 어떤 크기를 넘지 않는 변형의 양은 힘의 크기에 비례한다는 법칙으로 고체역학의 기본 법칙 중의 하나이다. 이 법칙이 성립하는 한계를 넘어서면 탄성한계를 넘게 되는 것이고 물체는 탄성을 잃게 되는 것이다. 이 법칙은 1678년 로버트 훅이 늘어나는 용수철을 가지고 실험적으로 연구해 발견했다.
<ref name="S과학사"></ref>
줄 178 ⟶ 182:
 
==== 행성의 궤도를 유지시키는 힘의 원천 ====
[[보렐리]]는 행성들이 여러 힘을 받지만, 그 힘들이 서로 평형을 이루기 때문에 행성들이 안정된 궤도상을 움직인다고 믿었다. 이 문제에 대해 훅은 진전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훅은 태양이 행성들에게 강력한 인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힘의 정확한 수학적 표 현표현(훅은 그것이 자력일 것이라고 믿었다)은 얻지 못했다.<ref name="R과학사"></ref><ref name="G과학사"></ref>
 
==== 훅의 우주 체계====
줄 189 ⟶ 193:
로버트 훅의 장비를 제작하는데 능숙하였던 능력은 기상학에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그는 지금은 친숙해진 시계 문자판 형태의 압력계, 풍속계, 개량된 온도계, 습도계 등을 발명하여 최초의 기상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대기압의 변화와 기후의 변화 사이에 관계가 있음을 유추해 내기도 하였다. <ref name="G과학사"></ref>
====Weather wiser====
1663년 크리스토퍼 렌은 "Description of a weather clock"을 Royal society에 주었다고 한다. 훅은 신속하게 한 두 개 정도를 더 했다고 한다. 그 결과는 훅과 렌이 그 주제에 대해 추후 20~25년 넘게 의논되었지만, Hooke이 실제적으로 'weather wiser'를 만들었다고 한다.<ref name ="논문3"></ref>
 
====Wheel Barometer====
어떠한 출처들은 크리스토퍼 렌은 수은만을 사용하는 barometer를 제안했고 로버트 훅이 날씨 관측자들에 의해 쓰이는 첫 번째 실제의 도구 'wheel barometer' 를 만들었다고 한다.<ref name ="논문3"></ref>
 
==== 그 외 기상학에 있어서의 기여 ====
훅은 왕립협회에 있으면서 많은 기상학에 관한 다양한 도구들을 만들었다. 리차드 월러의 책에서 인용하자면 "1683년 11월 14일, 훅은 공기의 속력, 바람의 속력, 바람의 세기에 관하여 한 축 위에 놓여있는 바람개비 4개를 측정하여서 움직이게 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바람개비들은 어떠한 기울기가 되어야하는 지에 대해 연구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풍속계는 훅에 의해 1667년 3월 12일에 느린 공기의 움직임을 더 잘 알 수 있게하는 방향으로 수정되었다고 한다. 관찰에 대해서는 기상학에 관한 훅의 지식이 담겨있는 A method for making the history of the weather(1663, Hooke)은 최초로 간단한 날씨 측정에 관한 사용법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1663년 10월 7일 전에 왕립협회에 의해 읽혔다고 한다. Thomas Birch's history of the Royal Society(Birch 1757)에서 인용하자면, "the president and Sir Robert Moray, and then to be registered and sent to the several persons who had been engaged in this work of observing the changes of the weather, as Dr. Power, Mr Beal etc"(이 책은 당시 기상을 관측하는 일을 하던 Power박사와 Beal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에게 보내졌다.)<ref name ="논문3"></ref>
 
줄 204 ⟶ 209:
 
==== 연소에 관하여 ====
로버트 훅은 연소실험을 통하여 연소와 호흡은 공기에서 ‘흡수’되는 무엇인가와 관련된다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그 당시 훅이 얼마나 ‘산소’의''‘[[산소]]’''의 발견에 매우 가까이 갔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실제로 산소는 1세기 정도 후에 [[프리스틀리]], 그리고 [[라부아지에]]에 의하여 발견되게 된다. 또한 훅은 몸의 운동으로 생기는 열과 두 사물의 결합과 관련된 연소를 명확히 구분하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훅의 독특한 실험정신을 볼 수 있는데 그는 귀에서 통증이 느껴질 때까지 펌프질을 해서 밖으로 공기를 빼낸 방 안에 앉아있는 등 스스로를 실험대상으로 삼기도 하였다.
<ref name="G과학사"></ref>
 
줄 211 ⟶ 216:
훅이 천문학 분야의 관찰에 대해 많은 기여를 하였을 때, 그는 건축학 분야에 있어서도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는 [[그리니치 천문대]](Royal Observatory at Greenwich)를 건설하는데 관여하였던 사람들 중 한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런던 전체 시의 건축의 감독관으로 있었던 것은 1666년의 대화재 이후이다. 그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유명한 파트너였던 [[크리스토퍼 렌]](Christopher Wren)의 영향과 더불어 경계나 다리와 같은 주되지 않은 작업을 맡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대표적인 건축물은 현재에는 3가지가 남아있다. 크리스토퍼 렌의 영향을 받아 훅이 만든 기념물, Warwickshire의 Ragley Hall, 그리고 자신의 웨스터민스터 공립학교 스승이었던 버스비를 기념하는 건축물인 Buckinghamshire의 Willen Church가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것보다 더 많은 건축물을 고안해 내기도 하였다.
<ref name="BBC로버트훅"></ref>
 
=== 심리학 ===
====사람의 기억====
훅의 잘 알려진 공헌 중 하나를 들자면 사람의 기억에 대한 과학적인 모델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1682년 왕립학회(Royal Society에서의Society)에서의 훅의 강연에서 그는 주로 심리적인 영향을 띠던 모델과는 사람의 기억의 기계적인 모델을 제시했다. 이 모델은 부호화, 기억 가능한 용량, 반복, 검색, [[망각]]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현대의 것과 놀라운 정확도를 가지고 있다. 그의 모델은 거의 200년 후인 1919년, 1923년의 Richard Semons의 작업과 다양한 유사점을 공유하고 있는데, 로버트 훅과 Richard Semon는 모두 기억이라는 것이 물리적이고 뇌의[[뇌]]의 어느 부분에 위치한다고 하였다. 이 모델의 더 흥미로운 점 중의 하나는 주의와 다른 포괄적인 영향을 부호화한다는 것이다. 그 모델은 공명을 이용해서 대응, 신호에 따른 검색을 한다. 그것은 새로운 기억들을 설명한다. 그 모델은 모델의 가정으로부터 나온 반복, 프라이밍, 그리고 망각을 하는 법칙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시스템을 제안한다. 이 강의는 그가 죽은 뒤, 1705년에 출판되었고, 기억 모델은 전에 없이 빛에 대한 작업에 실렸다고 한다. 이는 이 작업이 포스트-뉴턴주의 시절의 과학에서 작은 묶음으로 재검토된 것으로 추측되고, 출판되었을 때의 시간으로 여겨진다.<ref name= "영문위키">http://en.wikipedia.org/wiki/Robert_Hooke</ref>
 
== 주요 저서 ==
=== 마이크로그라피아 ({{lang|en|Micrographia}}) ===
[[파일:Micrographia title page.gif|thumb|180px|이 그림은 마이크로그라피아의 속표지의 그림이다.]]
로버트 훅의 대표적인 저서에는 [[마이크로그라피아]](Micrographia)가 있다. 원래 제목은 ''"Micrographia: or some physiological descriptions of minute bodies made by magnifying glasses : with observations and inquiries thereupon이다thereupon"''이다. 이 책을 통해 로버트 훅은 생물학 분야에서 이름있는 사람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현미경학]]이 하나의 과학분과로 성장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당대 최고의 현미경과 조명시스템을 개발하였으며 관찰에 적용하였다.<br />"미세기하"라고 직역할 수 있는 마이크로그라피아는 로버트 훅의 [[현미경]]을 통한 [[관찰]]을 총 정리해 담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665년 9월 출간된 책으로 [[왕립학회]](Royal Society)의 주요한 출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마이크로그라피아는 당시로서는 흔치 않게 영어로 쓰여져 있었으며, 또한 매우 분명하게 서술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많은 독자들이 쉽게 그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로버트 훅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사람들도 생겨나기도 하였다. 한편, 로버트 훅의 관찰에 따르는 많은 그림들은 [[크리스토퍼 렌]]({{lang|en|Christopher Wren}})이 그린 것이라고 한다.
<br />이 책을 본 [[Geoffrey Keynes]]는 “[[과학]]의 [[역사]]에서 이제까지 출판된 것들 중 가장 중요한 책”이라고 평했으며, [[새뮤얼 피프스]]는 "내가 이제까지 본 책 중에 가장 독창적인 책”이라고 말하였다.<br/>
이 책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저서인 별들의 소식과 종종 함께 언급되기도 하는데 별들의 소식이 거대 우주본성에 대한 사람들의 시야를 넓혀주었다면 마이크로그라피아는 미시세계에 대한 사람들의 시야를 열어주었다는 것에 의미가 있다. 또한 이 책은 현미경을 이용하여 쓴 최초의 책이기 때문에 더더욱 의미가 깊다. 이 책에서 훅은 우리가 쉽게 관찰할 수 없던 생물(파리, 진드기 등)뿐만 아니라 무생물(눈이나 유리막대)에 대해서도 다루었으며, 책 제목은 “미시세계”와 관련되어있지만 그는 달에 대한 관찰을 하기도 하였다.
줄 266 ⟶ 271:
[[파일:Cometa_Cover.jpg|right|120px|thumb|로버트 훅이 출판한(1667) 책인 Cometa의 표지이다.]]
로버트 훅의 저서는 매우 다양한 분야에 관여되어있다. 또한 그 당시에는 책으로 출판하는 것과 논문을 출판하는 것은 크게 다른 일은 아니었기 때문에 앞으로 소개될 내용은 훅이 다루었던 과학적 내용에 대하여 출판된 것들에 대한 것이다.
*Cometa(16671667년) : Cometa는 1664년 혜성이 로버트 훅에 의하여 관찰되고, 그 혜성이 1667년 두 번째로 나타났을 때 혜성에 대한 추정을 책으로 출판한 것이다. 훅은 그 책에서 혜성은 고체로 된 핵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빛을 낸다고 기록했다고 한다.
*An Attempt to Prove the Motion of the Earth by Observations(16741674년) : 이 논문에는 로버트 훅의 지구가 움직이는 방식을 관측을 통하여 증명하고자 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고 한다.
*A Description of Helioscopes(16761676년) : 훅은 태양 관측용 망원경에 대한 논의라는 제목으로 원형 스프링에 대한 몇 가지 원리들을 해설한 논문을 출판한다. 하지만 불씨가 되어 올덴부르그와의 말다툼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추가적으로 1672년 훅은 빛의 회절에 관한 논문을 내기도 하였으며, 그 내용은 뉴턴과는 사뭇 다른 내용이었다.
<ref name="BBC로버트훅"></ref>
<ref name="연표"></ref>
 
== 로버트 훅의 과학 방법 ==
훅은 젊었을 때 옥스퍼드에서[[옥스퍼드]]에서 베이컨을[[베이컨]]을 읽고 그의 열렬한 제자라고 선언했다. 그에 따라 훅은 베이컨 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휴월이 지적했듯이 훅의 방법은 베이컨의 <새 기관>을 그 시대에 적용하려는 시도였다.
 
<br/> 마이크로그라피아의 여기저기서 훅은 역학 연구에 적절한 공리와 이론을 제기하는 방법을 암시했다. 1705년에 나온 훅의 사후저작에는 “자연철학의 현상과 그 결함이 실험하고 관찰을 수집하는 방법적 절차에 의해 어떻게 치료될 수 있는가에 관한 일반적 도식 또는 관념”이라는 논문이 들어있다. 그것은 베이컨의 관한 가장 훌륭한 주석서라고 불리는데, 여기에 그가 보편적 귀납력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적 대수(philosophical algebra)라는 신비로운 말이 나온다. 철학적 대수는 철학적 진리를 탐구하는 데로 마음을 인도하는 방법이다. 그 내용은 베이컨의 방법과 비슷하나 자료수집보다는 질문에 답하는 실험을 강조하며 연구자는 해결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이미 알려진 가설에 능해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다. 그 다음 체계적으로 수집된 자연사를 기초로 공리를 제기하는 방법을 말한다. 끝으로 훅은 역사에 의해 피상적 원인을 발견하는 것과 철학적 대수가 필요한 물체의 보다 깊은 조직과 운동의 발전을 대비시킨다.
<br/>훅은 공리에서 실험으로, 실험에서 공리로 진행하는 것에 관한 깊은 연구와 추론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공리를 제기하는 방법과 충분한 자료 재고로부터의 연역에 언급하고 있다. 대수에 대한 설명은 없으나 마이크로그라피아와 시계의 용수철 달린 평형바퀴의 발명에서 그 방법의 이용이 문제된다. 또한, 훅은 마이크로그라피아에서 관찰 실험의 체계적 수집을 찬양할 수 있었다. 그의 방법은 극단적 베이컨주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엄격하게 실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가설을 사용했다. 그는 왕립학회가 독단을 피하고 충분한 근거가 없고 실험으로 확인되지 않은 가설을 옹호하지 않음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마이크로그라피아에서 이 규칙을 지키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1660년대초 훅이 왕립학회에 내놓은 논의에는 실험하는 방법에서 더 나아가 이론을 세우는 방법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마이크로그라피아에는 자연 전체를 이해하는 공리체계의 구조에 관한 대담한 사변이 있다.
 
뉴턴은 [[실험]], [[관찰]]로부터 원인을 비논증적으로 귀납하는 것을 [[분석]]이라 하고 원인으로부터 [[연역]]에 의해 현상을 설명하는 것을 [[종합]]이라 했다. 그러나 훅은 이 문제를 정반대로 이해했다. 곧 그는 분석적 방법을 원인에서 결과로 가는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사물을 이미 된 것, 알려진 것으로 생각한다. 곧 찾아진 것, 발견된 것이다. 이것은 가장 높은 것,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원리 또는 사물의 원인에서 시작해 보다 특수하고 종속적인 것으로 가지쳐 나간다.” 한편 종합적 방법은 실험적 탐구에 더 적합하다. 그것은 정당한 과정에 의해 결과에 관한 참된 정보로부터 그 즉각적 원인을 찾아내고 점차 더 높고 더 먼 효과적인 원인과 힘으로 나가 그 단계들을 가장 낮고 더 즉각적인 결론 위에 세운다.
<br/>훅은 공리에서 실험으로, 실험에서 공리로 진행하는 것에 관한 깊은 연구와 추론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공리를 제기하는 방법과 충분한 자료 재고로부터의 연역에 언급하고 있다. 대수에 대한 설명은 없으나 마이크로그라피아와 시계의 용수철 달린 평형바퀴의 발명에서 그 방법의 이용이 문제된다. 또한, 훅은 마이크로그라피아에서 관찰 실험의 체계적 수집을 찬양할 수 있었다. 그의 방법은 극단적 베이컨주의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엄격하게 실험에 바탕을 두지 않은 가설을 사용했다. 그는 왕립학회가 독단을 피하고 충분한 근거가 없고 실험으로 확인되지 않은 가설을 옹호하지 않음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마이크로그라피아에서 이 규칙을 지키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1660년대초 훅이 왕립학회에 내놓은 논의에는 실험하는 방법에서 더 나아가 이론을 세우는 방법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 마이크로그라피아에는 자연 전체를 이해하는 공리체계의 구조에 관한 대담한 사변이 있다.
훅의 초기 대수는 가설에 도달하는 방법보다 가설의 연역적 검증에 관심을 둔다. 따라서 그것은 엄밀하게 발견의 방법이 아니었다. 가설로부터의 연역을 강조했다 해서 훅을 [[데카르트]]주의자라고 할지 모르나 연역적 검증의 요소는 [[베이컨]]에게도 있었다. 요컨대 [[베이컨]]의 방법도 훅의 방법도 현상에서 [[가설]]로 가는 귀납기계가 아니었다. [[헤시]]에 따르면 베이컨의 방법은 단순히 제거하는 귀납이 아니라 형상의 본질에 관한 가설이 선천적으로 표용된다. <ref name="A논문"> 로버트 훅의 재평가, 송상용</ref>
 
뉴턴은 [[실험]], [[관찰]]로부터 원인을 비논증적으로 귀납하는 것을 [[분석]]이라 하고 원인으로부터 [[연역]]에 의해 현상을 설명하는 것을 [[종합]]이라 했다. 그러나 훅은 이 문제를 정반대로 이해했다. 곧 그는 분석적 방법을 원인에서 결과로 가는 것으로 보았다. “그것은 사물을 이미 된 것, 알려진 것으로 생각한다. 곧 찾아진 것, 발견된 것이다. 이것은 가장 높은 것, 가장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원리 또는 사물의 원인에서 시작해 보다 특수하고 종속적인 것으로 가지쳐 나간다.” 한편 종합적 방법은 실험적 탐구에 더 적합하다. 그것은 정당한 과정에 의해 결과에 관한 참된 정보로부터 그 즉각적 원인을 찾아내고 점차 더 높고 더 먼 효과적인 원인과 힘으로 나가 그 단계들을 가장 낮고 더 즉각적인 결론 위에 세운다.
 
훅의 초기 대수는 가설에 도달하는 방법보다 가설의 연역적 검증에 관심을 둔다. 따라서 그것은 엄밀하게 발견의 방법이 아니었다. 가설로부터의 연역을 강조했다 해서 훅을 [[데카르트]]주의자라고 할지 모르나 연역적 검증의 요소는 [[베이컨]]에게도 있었다. 요컨대 [[베이컨]]의 방법도 훅의 방법도 현상에서 [[가설]]로 가는 귀납기계가 아니었다. [[헤시]]에 따르면 베이컨의 방법은 단순히 제거하는 귀납이 아니라 형상의 본질에 관한 가설이 선천적으로 표용된다. <ref name="A논문"> 로버트 훅의 재평가, 송상용</ref>
<br/>훅은 자신의 과학방법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사실 자연의 과학은 이미 충분히 오랫동안 두뇌와 공상의 작업만을 수행해왔다. 이제는 물질과 명백한 것들에 대한 관찰의 평범함 과 건전함으로
되돌아가야 할 바로 그 때다."<ref name="G과학사"></ref>
 
“손과 눈에서 시작해 기억을 통하고 이성에 의해 계속 되어야한다. 그리고 다시 손과 눈으로 나와야한다.”<ref name="A논문"> 로버트 훅의 재평가, 송상용</ref>
이는 그의 과학 방법에 대한 사상을 대변해주는 말이다.
 
== 로버트 훅의 과학철학적 사상 ==
=== 과학과 기술의 관계 ===
훅의 접근법들은 기존 아리스토텔레스식의 중세의 자연철학적에서 현대적인 시각으로의 과학으로 가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실험들은 여러 분야에서 최초인 것들도 있으며 다양한 실험 기구들을 고안해 내기도 한다. 훅은 기술은 과학 없이 진보될 수 있어도 과학은 기술없이는 진보되지 못한다고 생각을 하였으며 좀 더 정확한 기구(예를 들자면 측정에 있어 더 정밀한 기구 등)를 만들어 내는 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의 노력은 여러 측정기구를 보완하기도 하였다.
<ref name="BBC로버트훅"></ref>
== 다른 과학자들과의 관계 ==
로버트 훅은 많은 과학자들과 동시대의 사람이다. 그는 우리가 소위 말하는 ‘뉴턴 혁명’ 대의 사람이며, 그에 따라 많은 과학자들과 연관성이 있다. 우선, 훅이 태어난 해에서부터 우리는 유명한 사람 한 명을 찾을 수 있는데 1635년, 훅이 태어나고 7년 뒤에 죽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이다. 그외에도 수학자 존 윌킨스(John Wilkins), 경제학자이자 발명가였던 윌리엄 패티(William Petty)천문학제 제레미 호록스(Jeremiah Horrocks), 왕립학회 최초의 두 천문학자였던 존 플램스테드(John Flamsteed)와 애드먼드 핼리(Edmond Halley), 프랑스의 천문학자 카시니(Cassini)등이 있다.
<ref name="G과학사"></ref>
<ref name="BBC로버트훅"></ref>
그는 또한 수많은 과학자들과 관계를 맺고 협력하기도협력, 또는 비판을하기도 하였는데, 잘 알려진 바로는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아이작 뉴턴]](Issac Newton), [[크리스티안 하위헌스]](Christian Huygens), [[안토니 레벤후크]](Antony van Leeuwenhoek), [[크리스토퍼 렌]](Christoper Wren) 등이 있다.<ref name="버클리 사이트"></ref> 훅은 보일의 조교였고 뉴턴과는 많은 면에서 충돌을 하였던 사람이다. 이제 다음의 이야기들은 로버트 훅이 위의 5명의 사람들과 관련이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 [[로버트 보일]]과의 관계 ===
[[파일:Robert Boyle 0001.jpg|150px|thumb|[[로버트 보일]]]]
신교 목사의 병약한 아들로 태어난 훅은 1653년에 옥스퍼드 대학의 기독교교회에 성가대로 뽑혀가게 되었다. 그 대학에서 훅은 과학에 비상한 관심을 가진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은 훗날 왕립협회의 설립자가 된 인물들이었다. 그 중 한 사람이 보일이었다. 보일의 부친은 코크(아일랜드 남서부의 주) 최초의 백작이었고, 그는 학부생이었던 훅을 실험실 조수로 고용했다. 로버트 훅은 그의 장비를 잘 만들고 실험에 능숙하기로 유명하였으며 곧 많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조수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리고 로버트 보일과 함께 할 때는 공기펌프를 발명하여 로버트 보일이 보일의 법칙(사진)을 발견해 내는데 큰 일조를 하기도 한다.
[[파일:Robert Hooke's Air pump apparatus.jpeg|left|150px|thumb|로버트 보일이 훅과 함께 제작한 첫 번째 Air-Pump, 이 도안은 1660년 New Experiments Physico-Mechanical에 처음 수록되었다]]
 
로버트 훅은 보일과 함께 공동연구를 하면서 실험기구의 중요성을 크게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후일 훅의 수많은 실험기구의 발견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로버트 훅은 로버트 보일과 함께 기체의 압력과 부피의 관계를 탐구하는 실험을 하기 위해 적절한 실험 기구를 고안해야 했다. 처음, 보일은 Otto von Guerike의 실험 기구를 개량하여 사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기구는 당시 실험기구들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몇 가지 포함하고 있었다; (1) 그것을 사용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물이 필요하였다. (번거로운 절차가 요구되었다) (2) 기구는 고체 용기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어떤 관찰 기구나 추가적인 실험 용구도 그 안에 삽입될 수 없었다. (3) 보일은 당시 이렇게 묘사했다고 한다."그 기구는 사용하기가 극히 어려웠다, 한 번 작동시키려면 장정 2명이 온 힘을 다해 몇 시간 동안 일을 해야 했다" 보일과 훅은 이러한 문제점에 당면하여 단점을 개량한 새로운 실험 기구의 개발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 옆의 그림은 보일과 훅이 공동 개발한 첫 번째 기구다. 이 기구는 이후 그들의 43개에 해당하는 실험에 사용되게 된다. 기구는 크게 2가지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각각 유리구(Receiver)와 펌프(Pumping apparatus)이다. 보일의 이 공기펌프(Air-Pump)는 당시에 새로운 실험을 대표하는 하나의 엠블럼(Emblem)역할을 하였다. 화학자들의 증류기와 가열기의 발명 이후로 공기 펌프는 실제 실험에 유용하게 사용된 첫 번째의 '비싸고 큰 실험 기구'였다. 또한 로버트 훅이 발명한 현미경과 이 공기 펌프(Air-Pump)는 함께 왕립학회에 비치되어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 왕립학회를 방문하였을 때 흥미(Entertain)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일례로, 1661년 2월 덴마크의 대사가 왕립학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보일의 공기 펌프를 이용한 실험을 관람하였다고 한다. 1667년에 마가렛 캐번디시(Margaret Cavendish), 즉 뉴캐슬 공작부인이 왕립학회를 방문하였을 때 비슷한 실험을 관람하였다. Pepys에 따르면, 당시 마가렛은 그 실험을 "실로 대단하다, 경이적이다라는 말 뿐이다"라며 극찬했다고 한다. 이처럼 훅과 보일이 공동개발한 실험 기구는 해당 실험의 정확성을 높여서 훌륭한 실험 결과를 이끌어 내는 데 큰 기여를 하기도 했지만 외부에 왕립 학회의 홍보 수단 중 하나로도 그 역할을 확실히 해냈었던 것이다. <ref name="G과학사"></ref><ref name="Stanford>http://www.rod.beavon.clara.net/robert_hooke.htm</ref>
<ref name="버클리 사이트"></ref>
 
==== [[로버트 보일]]과의 공동연구 ====
*보일과 함께, 그리고 그가 개량한 진공펌프를 이용해서 훅은 오늘날 ‘보일의 법칙’이라 불리는 기체의 압력과 부피의 관계에 대한 법칙을 도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ref name="R과학사"></ref>
줄 341 ⟶ 350:
== 로버트 훅의 재평가 ==
그의 업적은 너무나 광범위해서 몇 가지 주요 분야에 집중해 그의 행보를 재평가하고자 한다.
 
=== 광학 ===
 
줄 348 ⟶ 358:
행성들이 어떤 법칙에 의해 궤도에 붙어 있는가 하는 문제는 17세기 후반의 최대의 관심사였다. 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에 달려들었으나 해결의 실마리를 준 것은 훅이었고 최우의 승리는 뉴턴에게 돌아갔다. 훅은 인력의 개념을 가졌으면서도 어떤 물질에 특별한 힘의 개념을 버리지 못해 [[보편중력]]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이다. 훅의 제안은 원운동 일반과 특별히 천체역학에 대한 접근을 재정식화한 혁명적 통찰을 포함했다. 그는 원심력에 대해 말한 일이 없다. 그러나 훅은 궤도역학의 요소를 분명히 본 첫 번째 사람이었다. 직선적 관성의 원리를 인정한다면 궤도를 도는 물체는 중심으로 향한 어떤 힘에 의해 그 관성적 길로부터 계속 벗어나야 한다. 훅이 이러한 자신의 견해를 정식화하는 동안 뉴턴은 아직도 원운동을 원심력과 구심력의 균형에 의해 설명하려고 하였다. 이랬던 뉴턴에게 영감을 제공한 이가 바로 로버트 훅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훅의 역학개념의 명료성과 분석력은 그의 직관적 통찰을 따라가지는 못했다. 그는 타원궤도의 동역학의 문제를 제기했으나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의 역제곱관계 유도는 결함 투성이었다. 여기서도 독립적 통찰을 따라 정확한 양적 분석을 함으로써 빛깔 이론의 경우와 같이 관찰현상과 계산을 관련시키고 보편중력의 법칙을 증명한 것은 뉴턴이었다. 훅이 실패한 데서 더 나은 수학자 뉴턴이 성공하였던 것이다.
 
=== 훅의훅에 유별난대한 부정적인 재평가 - 성격과 과학자로서 능력의 결함결함에 (부정적인 재평가)관하여 ===
훅의 통찰은 아무리 과감하고 정확해도 결론보다는 통찰로만 남았다. 결론이 되려면 우선 증명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로버트 훅이 그의 뛰어난 통찰에서 결론으로 가는 것을 막은 것은 그의 유별난 성격과 능력의 결함이라는 증거가 많다. 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많은 평가가 있다. 안절부절하는 성미와 다방면의 임무가 커다란 체계적 업적에 필요한 꾸준한 노력을 불가능하게 했다. 타고난 성격에 왕립학회에서의 임무가 겹쳤다는 소리다. 매 시간마다 새 개념, 새 계획이 튀어나와 그가 하는 일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로버트 훅은 통찰력이 몰려 들어오게 했고, 빠르고 손쉬운 정복을 하는 과학의 [[돈 후안(Don Juan)]]이었다. 그와는 다르게 뉴턴은 한 개념에 붙으면 끝장을 볼 때까지 추구했다. 뉴턴은 여러 가지 연구에 뛰어들어 영웅적 발견을 했다. 훅은 많은 쉬운 승리를 즐겼으나 죽었을 때 그 자신의 것으로 확인된 기념비를 남기지 못했다. 훅에게는 편애하는 지지자가 유난히 많다. 이것은 그가 여러 분야에 능숙했었고, 여러 사람들에게 받은 부당한 대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과대평가도 눈에 띈다. 훅은 비상하게 재간 있는 사람이지만 재간을 과학적 천재로 잘못 평가하는 경향도 있다. 이것은 미국에서 발명왕 에디슨을 능력 있는 과학자로 오인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그의 능력을 재간으로만 보기도 어렵다. 그는 기구를 활용해 과학을 연구하였기 때문이다. Westfall은 훅을 뉴턴, 갈릴레오, 하위헌스와 같은 평면에는 놓을 수 없다고 한다. 훅이 한 공헌의 성질은 그들과는 아주 다르다는 것이다. 훅은 가장 순수한 자연철학자였다. 그는 대담하고 깊이 있는 아이디어를 가졌으나 대부분 아이디어로 남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과학적 수준으로 올려 놓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