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교육: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잔글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다른 뜻|한국의 교육|국호가 [[조선]]이던 옛 나라}}
조선 시대에도 관료로서 출세할 수 있는 정상적인 방법은 우선 과거에 합격하는 데 있었으므로 자연히 교육도 과거의 준비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또한 과거의 고시 과목이자 건국 초기부터 정교(政敎)의 근본이념으로 채택된 [[유학(儒學)]]입신양명(立身揚名)의입신양명의 유일한 도구로 양반 계급이 감독하였다. 따라서 교육도 대부분 과거의 응시자격을 구비하고 있는 양반의 자제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들은 대개 어릴 때 서당에서 유학의 초보적인 지식을 배우고 15~16세 이전에 서울은 [[학당]], 곧 4학(四學)에, 지방은 [[향교]](鄕校)에 들어가서 공부하여 몇 년 뒤에 과거의 [[소과(小科)]]에 응시, 여기에 합격하면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는 자격을 얻었다.
 
== 성균관과 학당 ==
서울에 있는 성균관과 학당(4학)은 중앙 정부에 직속되고 향교는 각 주현(州縣)에서 관할하던 관학(官學)으로서, 상호간에 상하의 연락 계통이 서 있는 것은 아니었고, 각각 독립된 교육 기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즉 성균관의 입학 자격은 [[생원(生員)]]·[[진사(進士)]]였지만 생원·진사는 사학이나 향교를 거치지 않아도 될 수 있었다. 또 성균관의 유생(儒生)에게는유생에게는 문과(文科)<ref>대과(大科)</ref>에 대과에 응시하는 자격과 기타 여러 가지 특전을 주었으나 그렇다고 성균관을 거쳐야만 문과의 응시 자격이 부여되었던 것은 아니고 그밖에 사람들도 얼마든지 시험은 치를 수 있었다. 이들 관학 가운데서 성균관만은 말기까지 줄곧 최고 학부로서의 시설과 권위를 유지하였으나 사학과 향교는 후세에 점점 쇠퇴하여서 유명무실하게 되고 그 대신 사숙(私淑)으로서 [[서당]](書堂) 이외에 [[서원]](書院)이 기세를 떨치게 되었다.
 
== 교육과 왕실 ==
12번째 줄:
이와 같이 유학을 중심으로 한 문과 계통의 교육 기관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무과(武科) 계통의 교육 기관은 전혀 없는 상태였다. 이것은 조선 사회가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경멸한 결과 생긴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리고 특수 분야인 [[잡과]](雜科) 계통의 교육 기관으로서는 태종 때에 [[십학]](十學)을 설치해 이학(吏學)·역학(譯學)·음양풍수학(陰陽風水學)·의학(醫學)·자학(字學)·율학(律學)·산학(算學)·악학(樂學) 등의 교육을 위한 시설을 두었다. 그러나 잡과는 특수한 신분층이 이를 세습하였기 때문에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한학(漢學)<ref>[[중국어]]</ref>·몽학(蒙學)<ref>[[몽고어]]</ref>·여진학(女眞學)<ref>[[만주어]]</ref>·왜학(倭學)<ref>[[일본어]]</ref>은 사역원(司譯院)과 어는 특정한 지방에서 의학(醫學)은 전의감·혜민서와 지방의 각 고을에서, 천문학·지리학·명과학(命課學)은 관상감에서, 주학(籌學)<ref>산학(算學)</ref>은 호조(戶曹)에서, 율학(律學)은 형조와 지방의 각 고을에서, 화학(畵學)은 [[도화서(圖畵署)]]에서, 도학(道學)은 [[소격서(昭格署)]]에서 각각 일정한 수의 학생을 가르쳤다.
 
== 개화기의 교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