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예: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Luckas-bot (토론 | 기여)
잔글 r2.7.1) (로봇이 더함: hr:Cao Rui
Abend (토론 | 기여)
편집 요약 없음
1번째 줄:
{{다른 뜻 넘어옴|조예|중국 후한 말의 무장|조예 (후한)}}
'''위열조 명황제 조예'''(魏烈祖 明皇帝 曹叡, [[205년]] ~ [[239년]] [[음력 1월 1일]])는 [[위 (삼국)|위나라]](魏)의 초대 황제인 세조 문황제(世祖 文皇帝) [[조비]](曹丕)의 장남이며, [[위 (삼국 시대)|위나라]]의 제2대 황제이다. [[자 (이름)|자]]는 원중(元仲). 어머니는 [[원희 (후한)|원희]](袁熙)의 처였던 [[문소황후|견희문소황후 견씨]](甄)이며 중국의 역대 황제 중 나라를 세우지 않고 조(祖) 자의 묘호를 얻은 최초의 황제이다.
 
== 생애 ==
 
어렸을 때 총명함으로 조부 [[조조]](曹操)에게 사랑을 받았으나 정작 아버지 [[조비]]에게는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유년 시절에 모후 견희가견부인이 [[조비]]에게 사사당하는 일을 겪었고, [[조비]]는 더더욱 조예를 피하게 되었다. 어느 날, 두 부자가 우연히 사냥을 하였는데 조예가조비가 어미 사슴을 쏘아죽인 뒤 아들에게 새끼 사슴을 어미죽이라 시키자 조예가 울며 말했다. "폐하는 이미 그 어미를 죽였으나 신은 도저히 어린 사슴을 죽이지죽일 않고 살려없습니다." [[조비]] 감동시켰고,그 말에 가엾은 마음이 들어 활을 버렸고 이 일로 황태자로 낙점되었다고 한다.<ref name="사마광">사마광, 《자치통감 삼국지》, 신동준 역, 살림출판사, 2004</ref> [[226년]], 부친 [[조비]]의 고명에 따라 [[조진]](曹眞), [[조휴]](曹休), [[사마의]](司馬懿), [[진군]](陳群) 등의 보좌를 받아 즉위하였다. 조예는 태자로 있을 때부터 조정대신과 교류하거나 정사를 묻는 일 없이 오로지 책만 읽었다.<ref name="사마광"/> 즉위 초에는 학문에 힘쓰며 직접 통치하지 않았으나, 곧 스스로 정치에 나섰다.
 
그는 우선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조부 조조와 아버지 조비와 같이 자신의 재산을 백성들에게 베품으로써 앞서 조비 시기 때 처럼, 위나라는 삼국 시대 중 가장 번영한 나라로 거듭난다. 그리고 [[촉한]]이 [[오 (삼국)|오]]와 연합하여 위를 공격하는 상황에서 [[사마의]] 등의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친히 전투에 참가하는 등 위나라를 존망 위기에서 구해내어 명군의 면모를 보였다.
12번째 줄: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궁전의 대들보와 기둥을 화려하게 조각하고 푸른 기와와 금빛 벽돌을 사용하며 이름난 명장 3만 명이 동원되고 백성 30만 명이 부역으로 끌려와 일했다. 이에 사도 [[동심]]이 표문을 올리지만 거절당하고 곧 태자사인 [[장무 (위) |장무]]가 표문을 올리지만 조예의 분노로 처형당하며 소부 [[양부]]의 표문도 거절당한다.
 
한편으로는 어머니인어머니 견부인을 문소황후(文昭皇后)로 추존하고 그녀를 모함하여 죽게 만든 [[문덕황후 (조위)|문덕황후]]를 사사한 후 목을 베어 효수하기도 하였다. [[239년]]에 조예는 35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는데 그의 사후, 어린 양자인 제왕(齊王) [[조방]](曹芳)이 황위를 계승하였고, 이때 조씨 일파가 사마씨에게 패하고 말았다. 실권은 사마씨가 장악하게 되고, [[서진]](晉)왕조의 성립을 초래하게 된다.
 
== 주석 ==
<references/>
 
{{전임후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