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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뜻 넘어옴|조예|중국 후한 말의 무장|조예 (후한)}}
'''위열조 명황제 조예'''(魏烈祖 明皇帝 曹叡, [[205년]] ~ [[239년]] [[음력 1월 1일]])는 [[위 (삼국)|위나라]](魏)의 초대 황제인 세조 문황제(世祖 文皇帝) [[조비]](曹丕)의 장남이며, [[위 (삼국 시대)|위나라]]의 제2대 황제이다. [[자 (이름)|자]]는 원중(元仲). 어머니는 [[원희 (후한)|원희]](袁熙)의 처였던 [[문소황후|
== 생애 ==
어렸을 때 총명함으로 조부 [[조조]](曹操)에게 사랑을 받았으나 정작 아버지 [[조비]]에게는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유년 시절에 모후
그는 우선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조부 조조와 아버지 조비와 같이 자신의 재산을 백성들에게 베품으로써 앞서 조비 시기 때 처럼, 위나라는 삼국 시대 중 가장 번영한 나라로 거듭난다. 그리고 [[촉한]]이 [[오 (삼국)|오]]와 연합하여 위를 공격하는 상황에서 [[사마의]] 등의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친히 전투에 참가하는 등 위나라를 존망 위기에서 구해내어 명군의 면모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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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궁전의 대들보와 기둥을 화려하게 조각하고 푸른 기와와 금빛 벽돌을 사용하며 이름난 명장 3만 명이 동원되고 백성 30만 명이 부역으로 끌려와 일했다. 이에 사도 [[동심]]이 표문을 올리지만 거절당하고 곧 태자사인 [[장무 (위) |장무]]가 표문을 올리지만 조예의 분노로 처형당하며 소부 [[양부]]의 표문도 거절당한다.
한편으로는
== 주석 ==
<references/>
{{전임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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