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드 라 투르 도베르뉴 (1611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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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튀렌의 개신교 신앙에 대한 확고한 고집이 대신과 튀렌의 관계에 여러가지 곤란한 요소를 만들었다. 리슐리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1643년]] 카리냐노 공작(대립하여 프랑스측으로 돌아섰다.)지휘하의 이탈리아 전투에 튀렌을 보냈다. 튀렌은 그해 연말 프랑스로 돌아오기 수주일 전에 토리노를 함락시켰다.
 
튀렌은 [[1643년]] [[12월 19일]] 프랑스 원수에 임명되어 곧 [[알자스]]에서 바이마르군(베른하르트 폰 작센-바이마르군의 연대) 재편성을 위해 출발했다. 바이마르군은 [[1643년]] [[11월 24일]]부터 25일에 걸쳐 벌어진 [[튀트린겐 전투]]에서 뼈아픈 패배를 겪은 뒤였다. 그때 32살이 된 튀렌은 이때까지 4명의 저명한 지휘관 밑에서 전투를 벌여왔다. 조직적인 오라녜 공, 격렬한 성격의 베른하르트, 용감한 라 발렌트 추기경, 완고하지만 기민한 하르크르 백작등 이들 모도모두 튀렌의 훈련 완성에 공헌했다. 튀렌은 [[1644년]] 천성과 고위군인의 직책을 위해 교육을 배웠고, 전투도 경험했다.
 
재편성의 임무를 마치고, 튀렌원수는 브라이자흐에서 라인강을 횡단하여 [[1644년]] 작전을 개시했다. 그러나 거의 동시에 [[앙기앵 공작]](훗날 대 콩데, [[콩데 공작 루이 2세 드 부르봉]])이 지휘하는 군대가 튀렌의 군대와 합류했다. 왕가와 인연이 있는 앙기앵 공작은 프랑스-바이마르 연합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