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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의 지배자, 울루그 베그는 제국의 옛 수도를 제국의 지적 활동의 중심지로 바꾸었다. 1417년부터 1420년까지 그는 사마르칸드의 [[레기스탄 광장]]에 [[마드라사]]를 짓고, 그곳에서 연구할 무슬림 천문학자들과 수학자들을 초빙했다. 이 마드라사는 아직도 남아있다. 천문학자들 가운데 울루그 벡의 가장 유명한 식객은 [[알리 쿠쉬치]]([[1474년]] 죽음)이다.
 
울루그 베그는 사마르칸드의 교외에 3층짜리 천문대를 지었다. 그곳에서는 당대 최신의 관측 기구를 사용하여 매일 천체 관측이 행해졌다. 이 천문대의 유적 일부는 ‘울루그 베그의 천문대’라는 이름으로 오늘날에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관광 명소 중 하나이다.<ref name="교양인_중앙아시아_울룩">마노 에이지, “티무르조 문화,” 《교양인을 위한 중앙아시아사》, 현승수 옮김(서울: 책과함께, 2009), p.273.</ref>
울루그 베그 스스로도 천문학, 역사, 문학 등의 분야에서 저술을 남겼다.<ref name="나가사와_울루그">나가사와 가즈도시,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 이재성 옮김(서울: 민족사, 1990), pp.167.</ref> 그는 역사가로서 《사한국사(四汗國史)》를 남겼다고 하며, 그가 여러 학자들과 함께 제작한 〈울루그 베그의 천문표(天文表)〉는 무슬림들의 그것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다.<ref>나가사와 가즈도시,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 이재성 옮김(서울: 민족사, 1990), p.260, n.8.</ref> 이러한 울루그 베그를 당대의 사람들은 그가 옥좌에 있는 학자라 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까지 비유하였다.<ref name="나가사와_울루그"/>
 
울루그 베그 스스로도 천문학, 역사, 문학 등의 분야에서 저술을 남겼다.<ref name="나가사와_울루그">나가사와 가즈도시,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 이재성 옮김(서울: 민족사, 1990), pp.167.</ref> 그는 역사가로서 《사한국사(四汗國史)》를 남겼다고 하며, 그가 여러 학자들과 함께 제작한 〈울루그 베그의 천문표(天文表)〉는 무슬림들의 그것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듣는다.<ref>나가사와 가즈도시, 《실크로드의 역사와 문화》, 이재성 옮김(서울: 민족사, 1990), p.260, n.8.</ref> 이러한그가 여러 학자들과 함께 제작한 〈울루그 베그를베그의 당대의천문표(天文表)〉(〈귀레겐 사람들은천문표〉라고 그가불리기도 옥좌에한다<ref 있는name="교양인_중앙아시아_울룩"/>)는 학자라당대 하여,세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가장 정확하다는 평을 듣는다. 이런 덕분에 〈울루그 베그의 천문표〉는 제자라틴어로도 알렉산드로스번역되어 대왕에까지유럽에서도 비유하였다사용되었다.<ref name="나가사와_울루그교양인_중앙아시아_울룩"/>
 
한편 울루그 베그는 《[[코란]]》의 거의 전체를 외우고 있었고, 아랍어를 쓸줄 알았으며, 법학과 논리학, 문장학, 운율학에도 정통했다. 수학이나 천문학에 대한 자질도 매우 뛰어났는데, 그는 때로 마드라사에서 벌어지는 수학과 관련된 토론에 참여했다. 계산 능력도 뛰어나, 말 위에서 특정 시각에 태양의 경도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 분단위로 암산할 수 있었다고 한다.<ref>마노 에이지, “티무르조 문화,” 《교양인을 위한 중앙아시아사》, 현승수 옮김(서울: 책과함께, 2009), p.273-74.</ref> 이러한 울루그 베그를 당대의 사람들은 그가 옥좌에 있는 학자라 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까지 비유하였다.<ref name="나가사와_울루그"/>
 
==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