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다 유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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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 유지'''(和田 雄治, わだ ゆうじ, [[1859년]] [[9월 29일]] ~ [[1918년]] [[1월 5일]])는 [[일본]]의 기상학자, 해양학자이다.
 
동경대학[[도쿄 대학]] 이과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일본 중앙기상대]](中央気象台)의 전신인 [[일본 중앙기상대|내무성지리국측량과기상괘]](内務省地理局測量課気象掛)에서 근무, 기상사업을 관할하였고, 기상의 조사연구에 평생을 전념하였다. 폭풍경보와[[폭풍 천문예보의경보]]와 [[천문 예보]]의 창시자이다. [[1880년]]의 [[후지산]] 정상에서의 기상 관측, 일본 근해의 해류 조사 및 연구와 동경물리학강습소[[도쿄 물리학 강습소]](현 [[동경이과대학도쿄 대학 이과 대학]])의 설립 참여가 주요 업적으로 꼽힌다. 한국의 과학사 연구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 한국의 과학사 연구 ==
[[1908년]] 4월에는 [[대한제국]]의 관측소기사(觀測所技師)로 임명되었다. 한국의 관측 기구를 연구하여 [[측우기]]를 세계 최초의 우량계로 소개하는 논문을 발표하였고,<ref>[http://weekly.donga.com/docs/magazine/weekly/2004/12/16/200412160500075/200412160500075_1.html 측우기를 중국에서 발명? 터무니없는 역사 왜곡], 《동아닷컴》, 2004.12.</ref> 학술보고서를 통하여 [[첨성대]]를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소개하였다.<ref>[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9/24/2009092400584.html 서울교대 이용복 교수, “첨성대, 천문대일 가능성 높아”], 《조선닷컴》, 2009.9.24.</ref> [[한일병합]] 후에는 [[조선총독부]] 관측소 기사로 활동하였고, 이 시기에 조선의 옛 관측기록들을 찾아내어 정리하는 등, 조선의[[조선]]의 과학에 대한 연구를 남겼다.
 
== 해류 연구 ==
[[1893년]]에는 [[일본 농상무성]](農商務省) 수산조사소의 수산조사위원회 회원으로서 해류병에 의해 일본 근해의 해류를 조사할 것을 제안하여, 1893[[1893년]]에서 ~[[1895년]]에 95년에이르는 기간 동안, 해류병을 놓아 [[오야시오 해류|오야시오]], [[구로시오쿠로시오 해류|구로시오]]의 상태를 조사하였고,조사하였다. 이것이 일본 최초의 과학적인 [[해류]] 조사였다. [[1913년]]부터는 [[오오사카오사카]]에서 [[마이니치 신문|마이니치 신문사]]의 후원을 받아 대규모의 해류병을 이용한 해양 조사를 실시실시하였고, [[1917년]]까지 13,357개의 병을 투입하여 그 중 2,990개가 회수되었다. 이 조사에 의해 일본 근해의 해류의 대체적인 형세가 명확해졌다. 조사 보고는 와다가 작성하였으나, 생전에는 출판되지 않고, [[1922년]]에 '일본환해 해류조사업적(日本環海海流調査業績)'으로서 출판되었다. '북서태평양 월별 평균수원분포도'도 발표되었다.
 
== 수상 경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