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니츠 선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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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8월 4일]], [[오스트리아]]가 [[오스만 제국]]과 휴전조약을 체결하여 뒤를 걱정할 염려가 없어졌기 때문에 코블렌츠에 모인 망명 귀족들은 프랑스에 즉시 침공을 주장했고, 아르투와 백작(comte d'Artois. [[루이 16세]]의 동생. 후일의 [[샤를 10세]])와 칼론을 파견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레오폴트 2세는 냉정을 되찾고 개인적인 감정으로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는 것이 신중하지 못함을 깨닫고 침공에 소극적이 되었다. 루이 16세가 헌법에 선서하면서 거짓으로 혁명에 협력한다는 내용을 [[마리 앙투아네트]]의 편지로 읽고, 직접적인 군사행동보다는 그 편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971년]] [[8월 24일]] [[레오폴트 2세]]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가 모여, 작센의 필니츠 성에서 기자 회견을 했지만, 회담의 주요 내용은 폴란드 분할하는 데 있어 양국이 공동 보조를 취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르투와 백작의 열성적인 설득에 영향을 받아 프랑스에 대한 외교적인 압박을 선언문 형식으로 내놓기로 동의하고 [[8월 27일]]에 《필니츠 선언》이라는 제목의 짧은 공동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프랑스 국왕의 문제는 유럽 전체 군주의 공통 관심사”이며, 프랑스 국왕을 “완전하게 자유로운 상태”로 만들기 위해 두 국왕은군주는 “필요한 무력을 사용하여 즉시 조치를 취하겠다”고 결의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수사적 단순한 위협에 지나지 않으며, 정말 전쟁을 일으킬불과했고 의지도,전쟁 준비도의지나 되어 있지준비는 않았다없었다.
 
그러나그런데 이 선언은 망명 귀족을 매우 기쁘게 했고, 프로방스 백작(comte de Provence. 역시 [[루이 16세]]의 동생. 훗날의 [[루이 18세]])이 [[9월 10일]] 헌법 비준에 반대하는 맹렬한 항의 성명을 내고 협박의 강도를 더했다.
{{인용문2|만약 광신적인 악업으로 전하([[루이 16세]])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외국 열강의 군대가 파리를 초토화시킬 것임을 파리 시민은 알아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이것이 오히려 혁명파의 분노를 사서, 온건한 정당인 지롱드 당에서도 주전파라는 그룹이 등장하여 외국과 싸워 국왕의 반혁명을 폭로하자고 주장했다. 또한 애국심의 고양은 파리의 [[상 퀼로트]]들을 더욱 과격하게 자극했다.
 
어쨌든 필니츠 선언은 프랑스 혁명이 유럽 전체를 둘러싼 전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