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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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한국 전쟁|친일파|국민방위군 사건}}
정부 수립 직후 그는 [[장택상]]과 [[조병옥]] 등이 친일파 경찰을 채용하는 것을 [[이승만]]에게 지적하였으나, 이승만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이승만과 결별하고 야당인사의 길을 걷게 된다. [[1949년]] [[3월 11일]] [[대한역도연맹]] 평의원과 재무부 부원으로 선출되었다.<ref>동아일보, 1949년 03월 11일자 2면</ref>
 
[[1950년]] [[5월]] 2대 국회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고 [[1949년]] [[곽상훈]], [[신익희]], [[이청천]] 등과 함께 백민태 등 테러리스트들의 암살표적으로 지정되기도 했다.<ref>이병주 《산하》5 (한길사, 2006) 22페이지</ref> [[1950년]] 6.25 이후 3일만에 [[서울]]이 공산치하에 점령되자 비밀리에 피난해 있다가 [[조병옥]] 박사와 합류해 학도의용군을 창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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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난학생 3천여명을 모아 전국학련 학도의용군을 편성, 그가 조직한 학도병들은 낙동강 방어선과 [[대구]] 지역을 지켜내며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의 가장 큰 공신으로 활약했다. 전쟁 중 그는 1951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의복과 보급품을 횡령·착복한다는 첩보를 입수, ‘국민방위군 비리 의혹을 제기하였다. 우연히 국민방위군에 속해있던 친구를 만나게 된 그가 아사 직전인 친구의 사연을 듣고 진상 조사에 착수하여 의혹을 제기했는데 이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국민방위군들에게 전달해야할 50여억환을 착복했다는 의혹을 접한뒤 조사, 그 결과 고위 간부들이 군인들의 의복, 식량 등에 관한 비용 약 72억원을 착복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후 [[국민방위군 사건]]의 진상 조사를 요구하며 [[자유당]] 정권을 비판, [[국민방위군 사건]]의 진실을 폭로하게 하였다. [[국민방위군 사건]]을 계기로 [[이승만]] 내각의 신뢰는 실추하게 된다. [[1952년]]초 휴전과 동시에 상경하였다. [[1952년]] [[4월 15일]] [[대한역도연맹]] 이사장이 되었다. 53년 11월 16일 다시 역도연맹 이사장에 재선출된다.
 
===== 사사오입 개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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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사사 오입 발췌개헌에 반대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위해 대통령 중임제한을 철폐하고자 헌법 개정을 추진하던 때였다. 그러나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자 단상에 뛰어올라 [[국회]]부의장 [[최순주]]의 멱살을 잡기도 한다. 개헌안이 한 표 차이로 부결이 되자 [[자유당]] 소속 의원이 '수학자들 이야기로 사사오입하면 통과됩니다. 계산 착오로 시정하고 가결된 것으로 합니다.' 하자 그는 사사오입의 비논리성을 따지다가 바로 단상에 올라 [[최순주]] 국회부의장 멱살을 잡고 '이게 무슨 짓이냐'며 항의하였다. 그러나 사사오입 개헌안은 그대로 통과된다.
 
[[1955년]] [[3월]] [[대한역도연맹]] 부회장이 되었다.
 
==== 야당 정치인 ====
===== 민주당 신파 활동 =====
이후 [[1955년]] [[11월]] [[민주당 (1955년)|민주당]]이 결성되자, [[장면]](張勉)을 찾아 [[민주당 (1955년)|민주당]]의 신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56년 [[10월 13일]] [[배재학원]] 운동장에서 열린 제1차 여야 민의원 친선 야구대회에 참가했다.<ref>조성관, 실물로 만나는 우리들의 역사 (웅진씽크빅, 2006) 122페이지</ref>
 
이후 [[장면]]이 [[부통령]]이 되면서 민주당 신파의 리더가 되었다. 이때 그는 신파 내에서도 청년 소장파의 리더격으로 활동한다.
 
[[1957년]] [[민주당 (1955년)|민주당]] 전라북도 도당위원장과 [[민주당 (1955년)|민주당]] 중앙당 훈련부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3월]] [[대한역도연맹]] 부회장이 되었다. [[1958년]] [[5월]] [[전주]] 을구에서 제4대 민의원에 [[민주당 (1955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9년]]
 
===== 3.15 부정선거와 4.19 전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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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15일]]의 [[3·15 부정 선거]]를 한 자유당 정권을 규탄하고, 부정선거 진실 규명 운동에 동참하였다. [[4월]] 부정선거 원흉에 대한 학생 시위대를 독려하였다.
 
마산 시위에서 실종된 학생 김주열 군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끔찍한 모습으로 바다에 떠오른다. 국민들은 분노는 극에 달했다. 곧이어 고려대 학생들의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국회의사당 앞을 점거한 학생들의 시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총장까지 나서봤지만 소용없었다. 이철승은 [[자유당]]의 무력 부대가 투입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학생들 앞에 나섰다. 반탁 운동 때부터 함께했던 후배들은 그의 설득에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ref name="bantack03"/> 이후 정치 깡패들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는 한편 만일의 기습을 대비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을 보호하려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지광]]이 주축이 된 자유당 무력부대들은 귀가하던 학생들을 습격했다.<ref name="bantack03"/> 많은 사상자를 낸 이 사건으로 인해 결국 국민이 들고 일어났다. 이후 이는 4.19 혁명으로 이어졌다.
 
[[파일:Chang Myon 194804'.png|thumb|left|230px|[[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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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8일]] [[장면]] 내각이 출범한다. 그는 [[장면]], [[박순천]], [[곽상훈]], [[정일형]] 등과 함께 [[민주당 (1955년)|민주당 신파]]의 일원이었으며, 민주당의 소장파 리더로서 그는 [[장면]]을 적극 지지했던 것이다. 이후 장면 총리의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며 정치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해 [[9월]] [[장면]]이 [[장도영]]을 육군 참모 총장에 기용하려 하자, 이철승은 [[장도영]]을 믿을 수 없는 인물이라며 양다리를 걸칠 수도 있음을 들어 적극 반대하였다. 그러나 장면은 말을 듣지 않았다. [[장도영]]은 후에 [[박정희]] 등과 결탁하여 [[5.16 군사 정변]]에 가담한다.
 
[[1960년]]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되고, [[대한체육회]]의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1961년]]초 U.N총회의제15차 UN총회의 [[한국]] 대표로 임명되어 출국, 총회에 참석하고 귀국하였다. 대한역도연맹 회장이 되었다.
 
===== 5.16 군사 정변 직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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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신민당 (1967년)|신민당]] 정무위원(政務委員)의 한사람으로 선발되고, 그해 [[6월]]에 대권도전 의사를 밝혔다. [[1971년]] 한국정책연구회(韓國政策硏究會) 이사장에 선임되었다.
1969
한국민권투쟁위원회 위원장
 
===== 유신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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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도통합론과 미군철수 사태 중재 ====
{{참고|박동선 게이트|반미주의|주한미군|주한미군 철수}}
[[1972년]] 국제[[테니스]]클럽 회장이 되었다. [[1972년]] 이후에는 "중도통합론"을 제창하여 유신독재에 대한 투쟁을 주장하는 [[윤보선]], [[장준하]], [[김영삼]], [[김대중]] 등과 대립하면서 박정희 정권과의 타협을 도모하였다. 1973년 [[신민당 (1967년)|신민당]] 부의장에 선출된 뒤 그해 야당몫의 국회부의장에제9대 [[대한민국의 국회|국회부의장]]에 피선되었고, [[1975년]] 제30차 [[국제연합]] UN총회 [[한국]]대표로 특별 선임, 파견되었다가 귀국했다. 이후 1976년 [[신민당 (1966년)|신민당]] 대표 최고위원에 피선되었다.
 
[[1976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는 비주류의 대표로 주류인 [[김영삼]] 총재측에게 대립하였으나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76년 당수에 선임된 뒤 중도통합론을 내세웠다. 그는 월남패망을 지켜본 그는 남북대치상황에서 국가의 안보와 자유는 대립적 개념이 아닌 상호보완적인 조화의 개념이라고 생각하였다. 또한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라는 흑백논리나 선명론이 이나라 헌정사를 후퇴시켜 왔다는 주장을 하였다. 따라서 국내정치는 서로 경쟁하되, 정치적으로 협력할 것이 있다면 협력을 하고 외교 안보 문제는 초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신민당]]내의 극한투쟁론자들은 그를 사쿠라로 몰면서 [[장면]]의 유약함과 [[유진산]]의 사쿠라와 엮어서 그를 비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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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6공때의 정치 활동 ====
[[1984년]]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총재에 추대되고 [[1985년]] [[대한체육회]] 고문이 되었다. 신군부 집권 후에는 [[1980년]] [[전두환]] 정권에 의해 잠시 정치규제에 묶여 11대 국회에 참여할 수 없었으나, [[1985년]] 정치 규제가 풀리면서 그해 [[대한민국 12대 총선|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신한민주당]] 소속으로 전주, 완주 지역구에 출마하여 다시 국회의원이 되었다. 1985년말 [[신민당]] 총재 [[이민우 (1915년)|이민우]]가 '민주화를 위한 몇가지 선행 조건을 수행한다면 [[내각제]]를 고려해볼 수도 있다'며 '[[이민우 구상]]'을 발표하였다. [[김대중]]과 [[김영삼]] 양 김 세력은 거세게 반발했다. 이철승은 양김에 맞서 [[이민우 (1915년)|이민우]]를 지지하고 나섰다. 그뒤 이민우 총재와 함께 변절자, 사쿠라, [[유진산]], [[장면]] 등과 함께 비난을 받고 수모를 당했지만 [[이민우 (1915년)|이민우]]를 지지하였다.
 
[[1987년]] 당시 직선제 개헌을 위해 선명투쟁을 주장하는 양김씨 틈새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던, 여당인 [[민주정의당]]의 당론과 같은 내각제 개헌을 주장하였고, 이에 동교동계와 상도동계가 강하게 반발하였다. 이때 다시 "사쿠라"라는 별명이 언급되었고 양김 세력은 이철승을 제명하라는 요구를 하였다. 결국 [[이민우 (1915년)|이민우]] 총재는 양김 세력의 압력에 '해당 행위'를 이유로 이철승을 제명하려 하였으나, 정치깡패 김용남(일명 용팔이)의 방해로 인해 제명하지 못했고 이는 [[통일민주당]]의 창당으로 이어지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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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후반 ===
==== 정계은퇴 후 시민사회단체 활동 ====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 낙선한 이후로 정계 일선을 은퇴하고 각종 우익운동과 반북반공운동에 앞장서면서 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총재, 여순순국선열기념재단 이사,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상임의장 등에 선출되었다. 이후 제3대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 민족정론소식 회장을 맡고 있다. 그뒤 우파 단체의 원로로 우익 청년들을 지도하였고, [[김영삼]], [[김대중]] 정권에 반대하는 우파 단체들의 후견인이 되었다. 여러 우익 단체 활동을 지원하고 강연 활동 등을 하였다.
 
[[2002년]] 2002 월드컵조직위원회 조직위원에 위촉되었다.
 
[[1996년]] 2002 월드컵 조직위원회 위원에 위촉되었고, [[1997년]] [[11월 21일]] [[서울특별시]] [[서울역]]광장에서 민족진영애국단체연합 등 범 우파단체를 소집, 민족진영구국안보총궐기대회를 주관하였다. [[1998년]] 대한민국건국50주년기념사업준비위원회 회장에 선임되고, [[1999년]] 운석 장면박사 기념사업회 창립 발기인이 되어 장면 기념사업회 창설에 참여하였다.
그뒤 우파 단체의 원로로 우익 청년들을 지도하였고, [[김영삼]], [[김대중]] 정권에 반대하는 우파 단체들의 후견인이 되었다. 여러 우익 단체 활동을 지원하고 강연 활동 등을 하였으며, [[2007년]] [[대한민국헌정회]] 회장이 되었다. [[2008년]] 대한민국건국기념사업회 초대 회장에 피선되었고, [[2010년]] [[1월]] 대한민국건국기념사업회 제2대 회장에 연임되었다.
그뒤 우파 단체의 원로로 우익 청년들을 지도하였고, [[김영삼2002년]], [[김대중]]2002 정권에월드컵조직위원회 반대하는조직위원에 우파 단체들의 후견인이 되었다재위촉되었다. 여러 우익 단체 활동을 지원하고 강연 활동 등을 하였으며, [[2007년]] [[대한민국헌정회]] 회장이 되었다. [[2008년]] 대한민국건국기념사업회 초대 회장에 피선되었고, [[2010년]] [[1월]] 대한민국건국기념사업회 제2대 회장에 연임되었다.
 
== 학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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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대학교]] 정치학과 졸업
*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석사
* 전주[[우석대학교]] 대학원 명예[[문학]][[박사]]([[1995년]] [[2월 24일]])
* [[전북대학교]] 대학원 명예[[문학]][[박사]]([[1995년]] [[2월 24일]])
* [[고려대학교]] 대학원 명예[[정치학]]박사([[1998년]] [[11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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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훈 ===
* [[국민훈장]] 무궁화장([[1991년]])
 
== 저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