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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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대조 [[이정란]]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창의해서 전주성을 지키는데 참여한 전주부윤 겸 삼도 소모사를 지냈다. 11대조 이영선은 지역의 명망있던 인사로 사후 [[반곡서원]]에 배향되었다. 10대 방조 [[이상진]]은 [[서인]] 중진으로 [[우의정]]과 판중추부사, 영중추부사 등을 지냈지만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될 때 소론이 되었다. 이상진의 동생인 이상민의 5대손이자 이철승의 6대조인 [[이진희]](李鎭熙)는 [[조선 정조|정조]] 때에 [[생원]]시와 [[진사]]시 양시에 합격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본적지는 [[전라북도]] [[전주시|전주부]] 서신동 290번지였는데, 17대조 때 [[완주군]] 구이면 장판리 모악산아래에 정착하였고, 그뒤 아버지의 대에 [[서울특별시|경성]]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 유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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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주북중은 조선인 학생이 많이 다녔고 전주남중은 일본인 학생이 많이 다녔는데 전주남중의 학생 오야붕이라 자칭하는 불량학생 마쓰오 다이사는 자주 전주북중 학생을 이유없이 괴롭히고 있었다. 마쓰오 다이사는 당시 [[전주]]에서 큰 '태양당'이라는 문방구 겸 인쇄소를 경영하는 [[일본인]] 지역 유지의 아들이었는데, 가끔 이 일본인의 태양당 문방구에는 조선인 학생들에게는 노트나 연필을 팔지 않을 정도로 [[조선]]인들을 무시하거나 멸시하기도 했다. [[마쓰오 다이사]]와 그의 꼬붕을 자처하는 학생들은 주변의 불량배로 학생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마쓰오 다이사의 패거리가 학생들을 이유없이 괴롭히는 것에 분노한 이철승은 수업을 마친뒤 하교길에 목검을 들고 골목을 지키고 있다가 마쓰오 다이사를 붙잡아 놓고 신나게 두들겨 패주었다. 그 뒤로 이 사건으로 [[전주]]시내 조선인 학생들의 사기는 한껏 높아졌고 불량학생들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었으나 이철승 자신은 '조행이정'이라 하여 태도불량이란 명목으로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 일제 강점기 활동 ===
==== 학창 시절 ====
[[파일:USSArizona PearlHarbor.jpg|thumb|left|태평양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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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불령(不逞) 조선인 학생으로 낙인 찍혀 출세길이 열리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일본 유학이나 관·공립전문대학에 진학할 수 없게 되었다.<ref name="민족1"/>
 
평소 조선인을 무시하며 학생들에게 폭행을 일삼던 일본인 선생을 들어 내동댕이쳤던 일로 그는 퇴학 위기에 직면하였으나 단체로 시험 거부를 하며 감싸준 친구들 덕에 겨우 퇴학은 면했으나 품행 성적은 갑을병정 중 ‘정’이었다. 이철승은 불령학생이자 요주의 인물로 떠올랐고 일부러 교사들로부터 불이익을 당하여, 졸업성적은 최하점이었다. 상급 학교에 진학하려 하였으나 그를 기피했고, 그런 그를 받아 준 것은 고려대의 전신 보성전문학교였다.
 
=== 일제 강점기 활동 ===
==== 태평양 전쟁 후반 ====
[[파일:Kim Seong-soo Chairman of Boseong Callege.jpg|thumb|left|200px|[[보성전문학교]] 교장 [[김성수 (1891년)|인촌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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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수립 직후 그는 [[장택상]]과 [[조병옥]] 등이 친일파 경찰을 채용하는 것의 부당함을 [[이승만]]에게 지적하였으나, 이승만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이승만과 결별하고 야당인사의 길을 걷게 된다. [[1949년]] [[3월 11일]] [[대한역도연맹]] 평의원과 재무부 부원으로 선출되었다.<ref>동아일보, 1949년 03월 11일자 2면</ref>
 
[[1950년]] [[5월]] 2대 국회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고 [[1949년]] [[곽상훈]], [[신익희]], [[이청천]] 등과 함께 백민태 등 테러리스트들의 암살표적으로 지정되기도 했다.<ref>이병주 《산하》5 (한길사, 2006) 22페이지</ref> [[1950년]] 6.25 이후 3일만에 [[서울]]이 공산치하에 점령되자 비밀리에 피난해 있다가 [[조병옥]] 박사와 합류해 학도의용군을 창설한다. 한편 6.25 전쟁 중 점령지인 서울에 있던 아버지 이석규가 퇴각하던 공비들에게 살해되었다는 비보를 접한다.
 
피난학생 3천여명을 모아 전국학련 학도의용군을 편성, 그가 조직한 학도병들은 낙동강 방어선과 [[대구]] 지역을 지켜내며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의 가장 큰 공신으로 활약했다. 전쟁 중 그는 1951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국민방위군 간부들이 의복과 보급품을 횡령·착복한다는 첩보를 입수, ‘국민방위군 비리 의혹을 제기하였다. 우연히 국민방위군에 속해있던 친구를 만나게 된 그가 아사 직전인 친구의 사연을 듣고 진상 조사에 착수하여 의혹을 제기했는데 이는 사실로 확인되었다. 국민방위군들에게 전달해야할 50여억환을 착복했다는 의혹을 접한뒤 조사, 그 결과 고위 간부들이 군인들의 의복, 식량 등에 관한 비용 약 72억원을 착복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