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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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 활동 초기 ====
===== 제헌국회의원 낙선 =====
[[파일:백범 김구.JPG |섬네일|왼쪽|150px|방북 직전 [[38선]]에서 선 [[김구]]]]
{{참고|남북협상|5·10 총선거}}
이후 [[1948년]] [[1월]] [[김구]]가 [[남북협상]]에 참여하면서 여러 번 그에게 북행을 만류했으나 듣지 않자 멀어졌다. [[4월]] [[김구]]가 북행을 결행하였다. 이철승을 비롯한 전국학련 일행들은 '이승만 박사와 노선이 분열되면 안된다'며 [[경교장]]에 드러누워 [[김구]]의 북행을 저지했다.<ref name="bantack02"/> 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구 일행은 결국 북한으로 갔다.
 
{{인용문|못 가십니다. 가시려면 우리의 배를 지프차로 넘고 가십시오.}}
 
그러나 [[김구]]는 자신이 체포되어 법정에 섰을 때는 도와주지 않고 이제와서 북행길은 반대하느냐며 학생들을 향해 실랑이를 벌였다. 그뒤 경교장에서 사람이 나와 김구는 북행을 하지 않을 것이라 설명했고 그는 청년들을 데리고 해산했다. 그러나 김구 일행은 결국 담벼락을 넘어 경교장을 나갔다. 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구 일행은 [[남북협상]]에 참여하러 북한으로 갔다.
 
그는 5.10 제헌 국회의원 총선거를 지지, [[5월 10일]]의 제헌국회의원 후보로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 전라북도#전주부 (제1선거구)|전주 제1선거구]]에 출마하였다. 그는 '나간다! 젊은 일꾼 이철승<ref name="hanjung40"/>' 등의 구호로 선거유세를 하였다. [[이승만]]의 전폭적 지지를 받던 [[배은희]] 목사와 [[와세다 대학]] 출신으로 전남 곡성군 곡성면장을 지내고 [[건준]]에 참여하였다가 [[한독당]]으로 건너온 [[신성균]], 정진희, 박완동 등이 출마하였다. 이철승이 출마하겠다고 나서자 아버지는 "공부하다 말고 학생이 무슨 소 리냐. 정 네가 나가겠다면 내가 절로 들어가 버리겠다.<ref name="hanjung40"/>"하고 완강히 반대하였으나 학련인사들이 집요하고 간곡하게 설득하여 허락을 받아냈다.<ref name="hanjung40"/> 우파 후보자들의 난립으로 후보단일화를 하지 못하면서 낙선하였다.<ref>이때 그의 숙부 [[이석주]]는 완주군 제2선거구에서 출마하였다.</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