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양공: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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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자 시절 ===
 
강양공은 [[1279년]](충렬왕 5년) [[고려 충선왕|세자]](충선왕)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충청도 아주(牙州,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시]]<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58908&mobile&categoryId=1588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아주〉항목]</ref>)에 있는 [[동심사]](東深寺)라는 [[절]]로 출가해야 했다. 다름아닌 [[고려 충선왕|세자]](충선왕)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강양공은 4년 뒤인 [[1283년]](충렬왕 9년)에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이때 [[제국대장공주]]가 강양공에게 옷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이후 정식으로 '''강양공'''(江陽公)에 봉해졌다<ref>[http://db.history.go.kr/KOREA/result.do?type=search&searchWord=%E6%B1%9F%E9%99%BD%E5%85%AC%E6%BB%8B%E5%B1%85%E9%95%B7&x=0&y=0 《고려사》권91〈열전〉권4 - 강양공 왕자]</ref>.
 
=== 사망과 후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