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안잉: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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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안잉이 한국전에 참전하려고 할 때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 [[펑더화이]] 등은 마오쩌둥의 장남인 그의 참전을 처음에 꺼려하여 마오쩌둥에게 말려달라고 부탁했다. 마오쩌둥은 이에 대해 "그는 어쨌든 마오쩌둥의 아들이다"라고 하며 참전을 반대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다른 인민들도 자식을 전쟁에서 잃었을 것임을 생각하여 마오쩌둥 주석은 아들의 시신을 가져오지 않았고, 훗날 '지도자라면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에 아들의 참전을 말리지 않았다고 기억했다.
 
[[펑더화이]]는 마오안잉 전사 소식을 [[마오쩌둥]]에게 직보하지 않고, [[저우언라이]]에게만 보고하였다. [[저우언라이]]는 이 소식을 수뇌부 사이에서 공유하였으나 [[마오쩌둥]]에게는 당분간 알라지 않도록 하였다. 결국 마오안잉이 전사한지 2개월도1개월도 넘어넘은 [[1951년]] 1월에 중국인민지원군의 제3차 전역이 감행된 이후에야 [[마오쩌둥]]의 비서 [[예즈룽]]이 이 소식을 전하였다. [[마오쩌둥]]은 아들의 전사 소식을 듣고 담배를 물고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하더니 "전쟁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지..."라고 했다고 전한다.
 
펑더화이가 마오안잉의 전사 소식을 뒤늦게 보고한 것이 나중에 [[루산 회의]] 때 숙청당하는 빌미로 사용되었다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