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그라쿠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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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또는 '''대(大)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 [[기원전 217년]]경 - [[기원전 154년]])는 기원전 2세기에 활동한 [[로마 공화정]]의 정치가이다.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으로 유명한 그라쿠스 형제([[티베리우스 그라쿠스|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가이우스]])의 아버지이다.
 
그의 초기 생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기원전 190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명령으로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에게 파견되어 로마군의 후방지원을 요청한 것이 첫 공식 업무로 기록된다. [[기원전 187년]]에는 [[호민관]]으로 선출되고 [[카토 (대)]]등이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실각을 노리고 벌어진 '스키피오 재판'사건에서 용기있게 스키피오의 변호를 맡았다. 이때 스키피오는 그의 딸 코르넬리아를[[코르넬리아 아프리카나]]를 그라쿠스에게 주기로 약속했다.
 
그 이후 그라쿠스는 로마 공화정의 공직에서 차근차근 길을 밟아 가는데 [[기원전 182년]]에는 [[안찰관]], 2년후에는 [[법무관]]에 선출되었고 [[기원전 179년]]에는 전직법무관 자격으로 군단을 이끌고 [[히스파니아]]에서 벌어진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 이 때의 공으로 그는 [[기원전 177년]] 집정관에 선출되었다. 집정관을 지낸후 그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약속대로 스키피오의 딸인 18세의 코르넬리아와 결혼했는데 무척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결혼이었다. 이 결혼에서 유명한 그라쿠스 형제가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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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공직에 있으면서 몇가지 중요한 법안들을 통과시켰는데 정부가 발주하는 건설사업을 일부 업자가 독점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안, 일정조건을 가진 해방노예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취득할 권리를 주는 법안등을 통과시켰다.
 
[[기원전 163년]] 그는 두번째로 집정관에 선출되어 [[시리아]]를 방문하여 그곳의 [[셀레우코스 왕조]]를 지원했다. 그는 유창한 [[그리스어]]를 구사했다고 하며 품위있고 단정한 품성으로 존경을 받았다. 기원전 154년경 사망했는데 어린아들 두명의[[티베리우스 아들과그라쿠스]]는 딸,10살이었고 그리고동생 역시[[가이우스 어린그라쿠스|가이우스]]는 미망인을아직 남겼다한살정도의 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