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그라쿠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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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티베리우스가 로마에서 보수파에게 죽임을 당하던 [[기원전 133년]] 가이우스는 매형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아프리카누스]]의 밑에서 [[히스파니아]] 누만티아에서 군복부를 하고 있었다. 이후 10년간 가이우스는 당시 로마 공화정의 지도자들이 거치는 평범한 경력을 쌓았다. 기원전 126년 부터 3년간은 [[사르데냐]]에서 군단의 회계감사관으로 복무했다.
 
==첫번째 호민관 기시==
[[기원전 124년]] 가이우스는 첫번째 [[호민관]]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호민관에 당선되자 그는 여러가지 개혁적인 법안을 들고 나왔다. 주요한 개혁 법안들은 아래와 같다.
* 농지개혁법 : 형 티베리우스가 추구하던 자작농 육성법
* 곡물법 : 국가가 일정량의 밀을 사들여 시가보다 싼 값으로 빈민에게 제공하는 것
* 병역법 : 17세 미만인 시민의 징병을 금함
* 공공사업법 : 가도, 교량, 항만등 공공사업을 진흥함
* 식민법 : 새로 생긴 식민지에 식민도시를 세우고 많은 시민을 이주 시키는 것을 골자로함
* 사법배심원법 : 새로이 대두된 계급인 에퀴테스(기사) 계급이 배심원을 독점하게 함
* 시민권 개혁법 : [[로마 시민권]]의 확대를 추구함
이러한 법안이 차례로 제출됨에 따라 가이우스는 정력적으로 활동했고 로마 민중의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전통적인 보수파들에게 법안의 일부는 매우 불쾌한 것으로 특히 시민권의 확대는 모든 [[원로원]] 의원이 가이우스에게 등을 돌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두번째 호민관==
==죽음과 그 이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