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표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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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의 외교노선에 반대하고 무장투쟁 노선을 주장하던 [[신채호]]·[[박용만]]·[[신숙]] 등을 비롯한 8개 단체 대표들은 1920년 9월 [[북경]]에서 [[군사통일회]]를 조직한다. 여기에 참가한 [[하와이]] [[독립단]] 대표 [[권성근]]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사실을 폭로하고, 이로써 [[군사통일회]]는 [[이승만]]을 성토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불신임'''을 결의하게 된다. 곧이어 이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불신임에 따른 제반문제를 논의하고 국내외의 독립군을 망라하여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할 것을 주장하고 5명의 준비위원을 뽑았다.
 
이어 1921년 5월 6일에는 [[만주]]지역의 [[김동삼]]·[[이탁]]·[[여준]]등이 [[액목현(額穆縣) 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개혁안>을 작성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추진한다. 이렇게 국외 각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를 부인하고 개조하자는 요구가 이어지자 [[상하이]]에서도 [[여운형]]·[[안창호]] 등에 의해 국민대표회의 소집문제가 제기된 후 '''국민대표회의 기성회'''가 결성되었고, 이를 토대로 1921년 8월 ''''국민대표회주비회국민대표회준비회'''가 성립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1 />
 
==경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