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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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년, [[유비]](劉備)가 [[유장 (후한)|유장]](劉璋)의 요청에 따라 익주로 들어가자 [[관우]](關羽)가 남군을 맡았다. 후에 유비가 위기에 빠지자 [[제갈량]](諸葛亮)이 재차 주력을 이끌고 익주로 들어갔기 때문에 형주는 극도로 취약해졌다. 이에 문빙은 [[악진]](樂進)과 더불어 심구에서 [[관우]](關羽)를 대파하고 정후로 작위가 올랐다. 216년, 요격을 위해 출진한 관우를 격파하고 218년 형주에 야욕을 드러내던 손권군에 편승하여 재차 관우를 위협하며 군량고를 불태웠다.<ref>후에 관우가 손권군의 병창을 공격하여 불화의 원인이 되었다.</ref> 유비가 관우를 구원할 병력을 파견하게 된다. 219년, 관우의 북상에 따라 이를 기습하지만 격파당했다.
 
7군이 수몰되고 병사를 수습한 문빙은 위와 동맹한 오군과 함께 관우를 포위, 공격하여 3천여 수급을 얻었다. [[220년]] 향후가 되고 222년 문제(文帝) [[조비]](曹丕)의 친정에 따라 [[하후상]](夏侯尙)과 더불어 강릉을 포위했다. 이때 하후상이 삼각주로 들어가 부교를 설치하고 공성에 집중하고자 하였으나 근방의 지리에 익숙하던 문빙이 홀로 반대했으나 장합 등은 이에 걱정만 많은 겁쟁이라고 비웃었으며 하후상이 강경하고 제장들 대부분이 찬성했으므로 문빙은 아무런 내색 없이 물러나 배를 끌어모았다. 오래지않아 [[동소]](董昭)의 상소에 따라 문제가 조칙을 내려 빠져나오게 했고 [[반장]](潘璋)이 뗏목으로 부교를 불태우려하고 있었으므로 하후상 등은 물러났다. 이때 문빙이 끌어모아두었던 배는 위군이 신속히 물러날 수 있게 하였다. 과연 열흘 후 동소의 상소대로 물이 차올라 삼각주는 모두 물에 잠겼으며, 부교도 떠내려갔다. 반장은 물이 찬 삼각주에 위군의 군선이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자 화공을 포기했다.<ref>장합은 이에 문빙에게 그를 비웃은 것을 사과했다.사과했으며, 문빙은 마찬가지로 아무런 내색 없이 장합을 용서하며 일으켜 세웠다.</ref><ref>연의에서는 오군이 위 문제 [[조비]](曹丕)가 탄 용선과 군함에 기습하여 화공에 조비가 위험에 처한 것을 구해줬다고 하나,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ref>
 
== 제갈량의 북벌과 말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