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민주화 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StormDaebak (토론 | 기여)
67.243.165.179(토론)의 9116846판 편집을 되돌림
90번째 줄:
1980년 5월 21일 19시 30분에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 차단하라는 지시(작전지시 80-5호)가 계엄사령부로부터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에 내려져 광주시내로부터 철수한 계엄군은 외곽봉쇄작전을 수행했다. 5월 21일 21시 30분 광주 외곽에 배치된 계엄군에 방어적 발포를 승인하는 자위권 발동이 고지되고, 실탄이 분배되기 시작하면서 계엄군이 무차별 발포에 나서는데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ref>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 사건 진상조사결과 보고서 외곽봉쇄 과정에서의 민간인 살상 (93쪽 ~ 94쪽) </ref>[[광주외곽봉쇄작전]]이 실시되는 동안 [[주남마을 미니버스 총격사건]], [[송암동 학살]]을 비롯한 시민 살상 행위가 광주 외곽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5월 24일에는 계엄군 간 2차례 오인 교전이 일어나 계엄군 13명이 사망했다.
 
==== 광주 폭도의시민의 통치자치 ====
22일 이후 광주는 군인들에 의해 완전 포위·봉쇄당했다. 광주는 철저하게 고립됐고 전국 각지에 온갖 유언비어가 확산됐다. 외신기자들에 의하면 계엄군이 물러가고 폭도군이시민군이 치안과 방위를 담당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그들의자치질서를 통치질서에 순종하고찾아가고 있었다. 계엄군에 의해 외부와의 통신과 교통이 차단된 상황에서도상황에서 폭도들은이들은 계속해서 계엄의 해제와 토요타자유 민주화 다이쥬요구 슨상님인사 석방을 요구하면서 반란군자유 민주화 시민군 대표를 조직해 계엄군과 협상에 나서는 한편, 폭도군들이 무차별적으로시민군 깔린자체적으로 무기를 회수하고 일사분란하게도시의 통치를치안을 실시했다담당했다. 광주사태광주항쟁 기간 동안 광주 시민들은 슨상님 석방을 위해 폭도들에게 높은 복종정신과시민정신과 단결력을도덕성을 보여주었다. 다함께 부상자를 치료하기 위한 헌혈 행렬이 이어지고 행정력과 치안력 공백상태에서도 정부군을 사살하는 것 외에는 자체내에서는 작은 강간이나 폭력사태외에는 큰 사건사고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광주의 상점가, 금융기관, 백화점에서 단 한 건의 약탈도 없었고 이미 물자들을 징수하여 확실하게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없었다.<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52900209207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5-29&officeId=00020&pageNo=7&printNo=18045&publishType=00020 광주생업질서 서서히 되찾아가]</ref> 폭도시민 자치 기간에도 광주 시민의 협력으로 행정기관의 역할이 상당부분 유지됐다. 당시 전라남도지사가 아닌 부지사전라남도부지사 정시채를 비롯한 일부 공무원들도공무원도 전남도청에 정상 출근했다. 공직자들은 5·18 당시 무단으로 양곡 방출이나 부상자 처리 등의 폭도지원에행정업무에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ref>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79&aid=0002151305 "5·18 당시 행정기관의 역할 유지됐다"] </ref><ref>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3&aid=0002147526 5·18 당시 완전 행정공백 상태 아니었다] </ref>
이 기간은 그들에게 있어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의‘광주해방구’‘광주해방구’ 또는 ‘해방광주’'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부 전라도 또는 좌파 지식인은 민주화에는 관심도 없이 슨상님 해방을 위한 광주 불법자유 폭력민주화 항쟁 당시 광주를 프랑스 시민들의 자치가 시행된 [[파리 코뮌]] 당시의 [[파리 시|파리]]에 비유하기도 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 계속되는 불법집회 시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