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민주화 운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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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개 과정 ===
==== 광주 시민의 불법폭력시위와시위와 계엄군의 공권력집행폭력 ====
 
19일부터 시위의 성격이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학생 중심이던 시위에 계엄군의 폭력에 분노한 광주의 일반 시민과 고등학생까지 거리로 뛰쳐나와 김대중선생님학생의 석방요구민주화 요구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19일 오후 시위에 참가한 시민은 최소 3천 명 이상으로 폭증했다. 이에 따라서 계엄군의 진압은 정해진대로가혹하게 따라가게 되었다변했다. 공수부대는 학생, 시민, 남녀노소, 행인을 가리지 않고 법을 무시하는 자들에게는 무차별적인 폭력을 가했다. 하지만 법을 지키기는 커녕 20일 시위대의 규모는 20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심지어 이들은 광주 시내 택시, 일부 시내·시외 버스 200여대를 이용하여200여대가 계엄군의 진입로를 가로막고가로막기도 압박하기까지했다했다. 이에 공수부대원들은 폭도들을시민들을 진압봉이나 총의 개머리판으로 무차별 진압하고구타하고 대검으로 찌르고 옷을 벗기는 등 과격진압을 행사했다자행했다.<ref name='충정작전1'/> 일부 시민들이 공수부대의 지휘를 맡고 있던 전투교육사령부를 찾아 직접 항의를 가했으나 이는 폭도들의 무차별 폭력시위로 인해서 효과가 없었다. 보안사의 통제를 받던 언론이 ‘불순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도하자보도한 데 격분한 시위대는 곧바로 [[광주 MBC]] 방송국을방송국를 방화하는 사태를 저질렀다방화했다. 이에20일 더이상의 미온적인 진압으로는 이들을 통제할 수 없음을 깨달은24시 계엄군은 20일 24시 광주역 앞에서 최초의 집단 발포를 가했다.<ref name='일지1'/> 발포 이후 2군 사령부로부터 발포금지와 실탄 배분 금지 명령이 떨어졌지만, 실제로 전장에서 목숨의 위협까지 받고 있던 11공수여단은 이를 무시하고 실탄을 분배했고, 다음날인 5월 21일에는 계엄군의 집단발포로 연결됐다.<ref name='아시아경제'>[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6&aid=0000248581 5ㆍ18 유혈진압 치밀하게 준비]</ref>
 
==== 계엄군의 발포 및 광주 시민 학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