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동맹: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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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 입장에서 경찰과 헌병,군대등을 동원한다면 관공서와 주요시설에 대한 방어가 가능하였지만, 이런 강압적인 방식은 광복을 맞이한 [[한국인]]들, 특히 청년,학생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일본 민간인들까지 피해가 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측에서 구상한 것이 '이이제이'방식이었는데, 일본측에 저대적이지 않은 한국인 지도자를 내세워 '과도적 시기에 치안유지를 담당케 한다'는 구상이었다. 여기서 핵심은 1.청년,학생을 중심으로 한 조선인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반일적인 인물로 존경받아야 한다는 점. 2.일정한 조직역량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점. 3.진격해오는 [[소련군]]에게 용납되는 동시에 일본측에게도 합리적인 인물이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8월 15일]] 아침, [[조선총독부]]는 이러한 점을 불렀고, 여운형은 총독부 요청에 따라 [[엔도 류사쿠]] 정무총감을 만나 치안권과 행정권 이양을 논의했는데, 여기서 여운형은 5가지 조건을 요구<ref>1.전국적으로 정치범, 경제범을 즉시 석방할것. 2.서울 3개월 분 식량을 확보할 것. 3.치안 유지와 건국 운동을 위한 정치 운동에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것. 4.학생과 청년을 조직, 훈련하는 데 대하여 간섭하지 말 것. 5. 노동자와 농민을 건국 사업에 동원하는 데 대하여 절대로 간섭하지 말 것.</ref>했다. 엔도 정무총감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여운형의 5가지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전국의 옥문이 열리고 정치범(독립운동지사들)이 석방되어 광복을 맞이했다. 한편, 여운형은 '단순히 과도적 시기의 치안유지에서 벗어나 이미 준비해 온 대로 독립국가 건설로 나아간다.'는 구상을 실행에 옮겨 [[8월 16일]] '치안유지대'가 아닌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했다.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은 짧은 기간이엇지만기간이었지만 광복 직후 공간에서 집회,결사 및 정치활동의 자유 등 전 민족이 향유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열어놓았고, 이는 일본의 바람과는 달리 치안유지권의 차원을 뛰어넘어 행정권 접수, 통치권 행사의 방향으로 치달았다. 지방 경우는 [[사회주의]],[[민족주의]]등 이념을 떠나서 지방의 유력한 유지들 및 지주들 역시 적극적으로 나서서 건준에 활동하기도 했다. 반면에, [[경성부]] 같은 경우 조선군사령부의 방해로 2중 정부와 같은 혼란이 야기되기도 했다.
 
==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