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마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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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경 ==
한니발은 [[이탈리아]]에서의 놀라운 전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동맹국들의 봉기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급기야 지원군으로 오던 동생 [[하스드루발 바르카]]도 [[메타우로 전투]]에서 죽고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또 다른 동생 마고네도 부상을 입고 [[제노바]]에 서에서 꼼짝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로마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승리에 이어 북아프리카에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나 신중을 기하는 원로원의 반대로 카르타고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시니사]]와 함께 서부 누미디아의 시팍스를 물리치고 기병을 획득하자 스키피오는 자신감을 얻고 공세에 나섰다.
 
그사이 양쪽은 강화를 위해 협상이 오고 가고 있었다. 로마는 아프리카 이외의 모든 영토의 포기, 5천 [[탈란트]]의 전쟁 배상금, 그리고 카르타고 해군의 해체를 조건으로 내세웠다. 한니발과 마고네는 카르타고 본국에서 송환명령이 떨어져 역전의 용사 1만2천명을1만2천 명을 이끌고 아프리카로 돌아왔다(마고네는 돌아오는 항해중에 사망했다.). 그러나 카르타고는 갑자기 강경론이 우세해지고 협상을 결렬시켰다.
 
이제 스키피오와 한니발은 각각 국가의 운명을 걸고 북아프리카에서 결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기록에 따르면 전투 전날 두 사람은 단독으로 대면했다고 한다. 이 단독 회담에서 한니발은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일을 상기시키면서 운명은 알 수 없는 것이니 위험한 도박을 피하고 여기서 그만두자고 말했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로마의 강화조건을 거듭 주장하며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고 말하여 결전을 피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