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레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삭제됨 내용 추가됨
EmausBot (토론 | 기여)
잔글 r2.7.3) (로봇이 바꿈: tr:Carrhae Muharebesi
잔글 없는 그림 제거
2번째 줄:
|분쟁=카레 전투
|전체=[[로마-파르티아 전쟁]]
|그림=Augustus Carrhae standard.jpg
|설명=
|설명=사로잡았던 4군단 기준을 돌려보내는 파르티아, [[기원전 19년|BC 19년]]의 로마 동전.
|날짜=[[기원전 53년]]
|장소=카레 근처(현재의 터키 [[하란]])
41번째 줄:
크라수스는 투창병을 보내보았으나 투창병 역시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후퇴할 뿐이였다. 진퇴양난인 상황이 된 크라수스는 파르티아 군의 화살이 떨어질때까지 기다려 보았으니 수레나스는 수천의 낙타 부대에 화살을 잔뜩 실은채 대기시켰으므로 화살 공격은 쉬기않고 계속되었다.
 
나중엔 그의 아들인 푸빌리우스에게 기병대로 구성된 별동군을 조직해 파르티아 군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 별동군은 화살 공격을 당한 뒤 파르티아 궁기병 그리고 카타프랙트에 포위되어 전멸당하고 푸빌리우스도 목숨을 잃는다. 창에 꽃혀 높히높이 들린 푸빌리우스의 목을 본 크라수스는 심하게 동요하였고 따라서 부상자들을 팽겨친채 근처 마을인 카레로 후퇴한다.
 
다음날 아침 수레나스가 보낸 사자가 회담을 제의하였다. 그 사자는 수레나스는 로마군이 시리아로 안전하게 귀국할 것을 보장해 줄 것이며 그 대가로 로마가 유프라테스 강 동쪽의 영토를 포기하는 것을 원한다고 하였다. 크라수스는 회담에 나가는 것을 꺼려하였으나 로마군은 크라수스가 회담을 하지 않으면 반란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하였다. 파르티아 군은 회담에 나온 크라수스를 생포하려고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크라수스와 그의 일행은 목숨을 잃는다. 카레에 있었던 로마군은 철수하려고 하였으나 대부분이 추격당해 죽거나 생포당하게 된다. 대략 2만명의 로마군이 목숨을 잃었고 1만명은 포로로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