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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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승병 (토론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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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뉴시스
}}</ref>
 
== 평가 ==
=== 긍정적 평가 ===
[[안병욱]]은 ‘칼의 힘과 펜의 힘’(사상계 1969년 12월호)에서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ref name="사상계와 장준하"/>
“‘사상계’는 펜을 가지고 칼에 대항했다. 지성의 무기를 가지고 권력의 아성에 육박했다. ‘사상계’에는 계몽의 메시지가 있었고, 비판의 언어가 있었다. 독재에 항거하는 자유의 절규가 있었고 관권에 대결하는 민권의 필봉이 있었다.”<ref name="사상계와 장준하"/> 함석헌은 ‘돌베개와 브니엘’이라는 글에서 장준하를 “장준하의 사람됨을 보면 구약의 야곱 같은 데가 있습니다. 참사람이 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무외(無畏)의 덕을 그는 풍부히 가지고 있습니다. 겁이 없습니다.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라고 평가하였다.<ref name="사상계와 장준하"/>
 
[[고려대학교]] 교수이자 장준하의 친구였던 [[김준엽]]은 신청년이라는 이름의 [[중국]] 잡지를 예로 들면서 '[[사상계]]'는 자유·민권운동, 통일 문제, 경제발전 문제, 새로운 문화의 창조, 정의로운 복지사회를 줄기차게 추구했고, ‘사상계’를 중심으로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지성인들이 모여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 평가하였다. <ref name="사상계와 장준하"/>
 
[[지명관]]은 ‘사상계’가 우리나라 지식인들에게 앙가주망의 전통을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했다. 그는 “장준하 선생 같은 분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다시 있을 수 없는 사람인 것 같다”고 했다.
<ref name="사상계와 장준하"/>
영문학자 여석기는 ‘사상계’는 ‘좋은 잡지’였고 ‘잘 팔리는 잡지’였다고 하면서, “이런 경우가 앞으로 있을 것이라고 잘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ref name="사상계와 장준하"/>
언론학자 정진석은 1950년대부터 6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잡지를 대표한 것은 ‘사상계’였으며, 장준하는 잡지 언론인으로는 제1인자로 이 나라 언론과 민주주의 발전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ref name="사상계와 장준하"/>
 
한편 [[한겨레 21]]에서 실시한 설문조사 에서는 8.15 해방 이후 [[민족주의]]의 맥을 이었다<ref name="맥1">[http://www.hani.co.kr/h21/data/L990315/1p6k3f0b.html 한겨레 21<!-- 봇이 따온 제목 -->]</ref>는 평가와 50∼60년대 척박한 지적 풍토 속에서 <사상계>를 창간하며 당시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 높게 평가됐다.<ref name="맥1"/>
 
=== 부정적 평가 ===
[[강원용]]은 그가 존경받아 마땅하나 그의 사상계 등의 활동에 대해 정치적인 목적이 강했다고 평하였다.<ref name="군인1"/>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상계 등을 창간하였으며 [[제3공화국]] 출범 뒤에는 박정희에 반대하는 것으로 정치적 목표를 바꿨다고 평하였다.<ref name="군인1"/> 한편 [[5·16 군사 정변]] 초기 [[5·16 군사 정변]]을 지지한 것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ref group="주">장준하는 [[장면]] 내각의 관료였다.</ref> 그가 '김구한테 붙었다가 [[장면]]한테 붙었다가, 또 [[윤보선]]을 따라다니며 색깔논쟁에 열 올렸다'는 비판도 있다.<ref>역사법정 (함규진 저, 포럼, 2006) 310페이지</ref>
 
또한 장준하는 [[이범석]]이 [[족청]]을 통해 발호하자 독립군 시절 사령관이었던 그와 인연을 끊을 정도로 청렴했지만,<ref>《장준하 평전》 301쪽</ref> 한편으로는 [[김원봉]]이 일본군을 탈출한 한국인 청년들을 미인계로 매수하려 한다고 비이성적인 비난을 한 바 있다.<ref>장준하, 《돌베게》 268쪽</ref><ref>《장준하 평전》 263쪽</ref> 여기에는 [[김구]]의 비서로서 그 영향을 받은 반공주의적 시각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야마하]] 피아노가 일제라고 광고를 싣지 않을 정도의<ref>《장준하 평전》 391쪽</ref> 결벽적 배일주의자면서 대표적인 친일 문인 [[김동인]]을 기리는 [[동인문학상]]을 제정하고,<ref>《장준하 평전》 361쪽 ~ 364쪽</ref> 《사상계》 1957년 12월호에는 역시 친일파인 [[최남선]]을 추모하는 〈육당 기념호〉를 발행하며 최남선을 ‘친근한 벗이요 경애하는 스승’이라고 찬양하는 권두언을 쓰는 등<ref>《장준하 평전》 365쪽 ~ 368쪽</ref>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였다. 장준하의 이런 모순된 모습들은 그의 시각이 어느정도 왜곡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며, [[냉전]] 시기 반공주의 지식인의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 기타 ==
[[윤보선]], [[장면]], [[이철승]], [[유진산]], [[김영삼]], [[김대중]] 외에 3공, 4공 시절 [[박정희]]의 강력한 정치적 경쟁자들 중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었으며 일부에서는 그를 현직 대통령인 [[박정희]]에 대비하여 재야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아들인 미국 커넷티컷의 [[장호준]]목사가 [[박정희]] 아들이며, [[박근혜]] 남동생 [[박지만]]에게 공개 서한을 썼다. "장준하 선생 아들이 박지만에게 보내는 글"
<ref>[http://blog.ohmynews.com/jeongwh59/254592 오마이뉴스]</ref>
 
=== 병적 기록부 발견 ===
장준하 등이 [[일본군]]을 탈영했다는 주장의 진실을 찾기 위해 [[2004년]] [[열린우리당]] 소속 국회의원 [[전병헌]]은 직접 [[일본군]] 측 자료를 조사하던 중 장준하의 일본군 탈영 증거와 병적기록부(유수명부)를 발굴해냈다. 이는 [[2004년]] [[10월]]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언론에 공개했다.<ref name="gtalyoung">[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13425 일본군이 작성한 장준하 탈출 기록 발견] 오마이뉴스 2004.10.17</ref>
 
당시 [[열린우리당]] 전병헌 국회의원은 6일 "<유수명부(留守名簿)>에 남겨진, 장준하 선생이 1944년 1월 일본 학도병으로 징집되었다가, 그해 7월 7일 중국 서주에서 탈출해 6000리 대장정 끝에 중경에 도착, 한국 광복군에 합류했다는 기록이 발견됐다"며 "이 기록은 장 선생의 자서전 <돌베개>의 기록과도 일치한다"고 밝혔다.<ref name="gtalyoung"/> 이로써 장준하 선생의 일본군 징집 및 탈출 기록이 공개되었다.<ref name="gtalyoung"/>0
 
전 의원에 의해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유수명부>에서 찾아낸 장준하 선생의 이름(장안준하·張安俊河), 소속부대(제7991부대), 생년월일 및 본적지(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대관동 258), 부친의 성명(장석인·張錫仁), 역종·병종 및 계급, 공탁금 번호와 상단에 탈출일자 및 탈출지 등이 기재돼 있다.<ref name="gtalyoung"/> 전체 114권으로 구성된 '유수명부'는 [[일본군]]의 해외파견 군인·군속의 명부로 탈출(逃亡) 및 이탈, 사망 등 행방불명된 자의 기록을 날짜와 장소와 함께 기록돼 있으며, 일본군으로부터 이탈하거나 탈출한 한국인 병사들에 대한 기록이 각 권 뒷부분에 따로 정리돼 있다.<ref name="gtalyoung"/>
 
병역 내용에 의하면 1944년(소화 19년) 1월 20일 일본군 제65사단 7991부대에 배치됐으며, 같은 해 7월7일 중국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에서 탈영한 것으로 나타났다. 명부는 상단에 ‘도망(逃亡) 쉬저우’라고 기재, 장 선생의 탈영 사실을 밝히고 있다.<ref name="munhwa002"/> 이는 장준하가 생전에 자서전 ‘돌베게’에서 밝힌 내용과 일치한다.<ref name="munhwa002"/>
 
=== 김원봉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
장준하는 [[조선의용대]]의 수령이자 [[한국광복군]] 1지대장이었던 [[김원봉]]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장준하는 [[김원봉]]을 가리켜 '판에 박힌 [[공산주의자]].<ref name="dolbaegae205">장준하, 《돌베개》 (도서출판 세계사, 2005) 205페이지</ref>'라며 혹평을 가하기도 했다.
 
[[1944년]] 일본군 탈출 직후의 장준하, [[김준엽]] 등을 영입하려는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계속 사람을 보내 이들을 설득하려 했는데, 장준하는 [[김원봉]]이 [[일본군]] 탈영병, 학도병들 사이에 이간질을 획책했다고 한다. '김약산의 부하로 파견된 분견대장의 설득공작이 실패한 것을 알아차린 그들은 곧 우리에게 이간공작을 시작했다.<ref name="dolbaegae205"/>는 것이다.
 
또한 [[장준하]]는 [[1945년]] 광복 직후에도 그가 이간질을 획책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광복군 대원들의 무지와 행패가 계속될 때 그가 이를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일본군 출신 부대로 하여금 [[임정]]이나 [[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부채질하면서 그 어부지리를 노리는 김원봉의 계산이었다<ref name="dolbaegae328">장준하, 《돌베개》 (도서출판 세계사, 2005) 328페이지</ref>'고 했다. 광복군 편입을 거절하고 버티던 일본군 출신 부대의 책임자 격으로 있던 황모에게 김원봉이 직접 이소민을 파견, 광복군 제1지대로 끌어들일 공작을 했다<ref name="dolbaegae328"/>는 것이다.
 
일본군이나 학도병 탈영자들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김원봉]] 일파에서는 미인계까지 쓰고 나서는 형편<ref>장준하, 《돌베개》 (도서출판 세계사, 2005) 254페이지</ref>'이라 하였다. 또한 장준하는 [[김원봉]]이 [[광복군]]의 신뢰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계략을 꾸몄다고 비난했다. '김원봉이 열심히 임정과 광복군에 대한 불신작용을 일본군 출신 부대에 가했다.<ref name="dolbaegae328"/>'고 진술했다.
 
장준하는 [[김원봉]]의 민족유일당 결성 운동의 의도 역시 의심하였다. '김약산은 그때 [[김규식]] 박사를 당수로 업고 이끌고 있는 조선민족혁명당의 부당수로 있기는 했으나 이미 판에 박힌 [[공산주의 |공산]]분자의 한사람이었다. 아마 연립정부 내각에 참여하기 위해서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했던 것 같다.<ref name="dolbaegae205"/>'는 것이다. 그는 [[김원봉]]을 부정적으로 평가했고, 김원봉이 월북함으로서 그의 주장은 신빙성을 얻게 되었다.
 
== 학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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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유쿠
}}</ref>
 
 
* 2004년 1월17일 KBS 인물현대사27편 장준하 2부 거사와 죽음의 진실<ref>{{방송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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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유쿠
}}</ref>
 
 
 
== 상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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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4월 15일]] [[한신대학교]] 제정 제1회「한신상」
* [[1999년]] [[11월 1일]] 「[[금관문화훈장]]」
 
== 평가와 비판 ==
=== 평가 ===
[[안병욱]]은 ‘칼의 힘과 펜의 힘’(사상계 1969년 12월호)에서 다음과 같이 저술했다. <ref name="사상계와 장준하"/>
“‘사상계’는 펜을 가지고 칼에 대항했다. 지성의 무기를 가지고 권력의 아성에 육박했다. ‘사상계’에는 계몽의 메시지가 있었고, 비판의 언어가 있었다. 독재에 항거하는 자유의 절규가 있었고 관권에 대결하는 민권의 필봉이 있었다.”<ref name="사상계와 장준하"/> 함석헌은 ‘돌베개와 브니엘’이라는 글에서 장준하를 “장준하의 사람됨을 보면 구약의 야곱 같은 데가 있습니다. 참사람이 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무외(無畏)의 덕을 그는 풍부히 가지고 있습니다. 겁이 없습니다.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라고 평가하였다.<ref name="사상계와 장준하"/>
 
[[고려대학교]] 교수이자 장준하의 친구였던 [[김준엽]]은 신청년이라는 이름의 [[중국]] 잡지를 예로 들면서 '[[사상계]]'는 자유·민권운동, 통일 문제, 경제발전 문제, 새로운 문화의 창조, 정의로운 복지사회를 줄기차게 추구했고, ‘사상계’를 중심으로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지성인들이 모여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고 평가하였다. <ref name="사상계와 장준하"/>
 
[[지명관]]은 ‘사상계’가 우리나라 지식인들에게 앙가주망의 전통을 만들어주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했다. 그는 “장준하 선생 같은 분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다시 있을 수 없는 사람인 것 같다”고 했다.
<ref name="사상계와 장준하"/>
영문학자 여석기는 ‘사상계’는 ‘좋은 잡지’였고 ‘잘 팔리는 잡지’였다고 하면서, “이런 경우가 앞으로 있을 것이라고 잘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ref name="사상계와 장준하"/>
언론학자 정진석은 1950년대부터 6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잡지를 대표한 것은 ‘사상계’였으며, 장준하는 잡지 언론인으로는 제1인자로 이 나라 언론과 민주주의 발전에 획기적인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ref name="사상계와 장준하"/>
 
한편 [[한겨레 21]]에서 실시한 설문조사 에서는 8.15 해방 이후 [[민족주의]]의 맥을 이었다<ref name="맥1">[http://www.hani.co.kr/h21/data/L990315/1p6k3f0b.html 한겨레 21<!-- 봇이 따온 제목 -->]</ref>는 평가와 50∼60년대 척박한 지적 풍토 속에서 <사상계>를 창간하며 당시 지식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 높게 평가됐다.<ref name="맥1"/>
 
=== 비판 ===
[[강원용]]은 그가 존경받아 마땅하나 그의 사상계 등의 활동에 대해 정치적인 목적이 강했다고 평하였다.<ref name="군인1"/>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상계 등을 창간하였으며 [[제3공화국]] 출범 뒤에는 박정희에 반대하는 것으로 정치적 목표를 바꿨다고 평하였다.<ref name="군인1"/> 한편 [[5·16 군사 정변]] 초기 [[5·16 군사 정변]]을 지지한 것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ref group="주">장준하는 [[장면]] 내각의 관료였다.</ref> 그가 '김구한테 붙었다가 [[장면]]한테 붙었다가, 또 [[윤보선]]을 따라다니며 색깔논쟁에 열 올렸다'는 비판도 있다.<ref>역사법정 (함규진 저, 포럼, 2006) 310페이지</ref>
 
또한 장준하는 [[이범석]]이 [[족청]]을 통해 발호하자 독립군 시절 사령관이었던 그와 인연을 끊을 정도로 청렴했지만,<ref>《장준하 평전》 301쪽</ref> 한편으로는 [[김원봉]]이 일본군을 탈출한 한국인 청년들을 미인계로 매수하려 한다고 비이성적인 비난을 한 바 있다.<ref>장준하, 《돌베게》 268쪽</ref><ref>《장준하 평전》 263쪽</ref> 여기에는 [[김구]]의 비서로서 그 영향을 받은 반공주의적 시각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야마하]] 피아노가 일제라고 광고를 싣지 않을 정도의<ref>《장준하 평전》 391쪽</ref> 결벽적 배일주의자면서 대표적인 친일 문인 [[김동인]]을 기리는 [[동인문학상]]을 제정하고,<ref>《장준하 평전》 361쪽 ~ 364쪽</ref> 《사상계》 1957년 12월호에는 역시 친일파인 [[최남선]]을 추모하는 〈육당 기념호〉를 발행하며 최남선을 ‘친근한 벗이요 경애하는 스승’이라고 찬양하는 권두언을 쓰는 등<ref>《장준하 평전》 365쪽 ~ 368쪽</ref>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였다. 장준하의 이런 모순된 모습들은 그의 시각이 어느정도 왜곡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며, [[냉전]] 시기 반공주의 지식인의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할 수 있다.
 
== 가족 ==
가족들은 [[박정희]]정권에 의해 뿔뿔히 흩어졌으며, 부인과 맏아들은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다.
<ref>[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47319.html 장호권 인터뷰 한겨레신문]</ref>
 
* 조부 : 장윤희(張潤熙, [[1864년]] ~ [[1950년]])
** 고모 : 장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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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모 : 노선삼(盧仙三, [[천주교]]인 세례명은 비리스도)
 
=== 유족의 생활고 논란 ===
== 기타 ==
유족들은 사후에도 [[박정희]] 정권에 의한 압박에 시달렸다. 장남 [[장호권]]은 [[1976년]]에 테러를 당해 투병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정보기관의 압력으로 취업이 곤란해져 가족이 흩어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반면 [[박정희]] 정권 말기 [[중앙정보부]] 부장이었던 [[김재규]]는 유족에게 미국행을 권유하는 등 일부 편의를 제공했다.{{뉴스 인용
[[윤보선]], [[장면]], [[이철승]], [[유진산]], [[김영삼]], [[김대중]] 외에 3공, 4공 시절 [[박정희]]의 강력한 정치적 경쟁자들 중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었으며 일부에서는 그를 현직 대통령인 [[박정희]]에 대비하여 재야 대통령이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
|url=
 
|제목=아버님은 암살당했다
아들인 미국 커넷티컷의 [[장호준]]목사가 [[박정희]] 아들이며, [[박근혜]] 남동생 [[박지만]]에게 공개 서한을 썼다. "장준하 선생 아들이 박지만에게 보내는 글"
|저자=장호권
<ref>[http://blog.ohmynews.com/jeongwh59/254592 오마이뉴스]</ref>
|작성일자=1983-08
 
|확인일자=
=== 병적 기록부 발견 ===
|출판사=신동아
장준하 등이 [[일본군]]을 탈영했다는 주장의 진실을 찾기 위해 [[2004년]] [[열린우리당]] 소속 국회의원 [[전병헌]]은 직접 [[일본군]] 측 자료를 조사하던 중 장준하의 일본군 탈영 증거와 병적기록부(유수명부)를 발굴해냈다. 이는 [[2004년]] [[10월]] 국회 정무위원회에서 언론에 공개했다.<ref name="gtalyoung">[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13425 일본군이 작성한 장준하 탈출 기록 발견] 오마이뉴스 2004.10.17</ref>
}}</ref> [[2012년]]에 장남 [[장호권]]은 노모와 일원동의 월세집에서 연금 월 60만원에 의지하여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다고 증언하였다.{{뉴스 인용
 
|url=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47319.html
당시 [[열린우리당]] 전병헌 국회의원은 6일 "<유수명부(留守名簿)>에 남겨진, 장준하 선생이 1944년 1월 일본 학도병으로 징집되었다가, 그해 7월 7일 중국 서주에서 탈출해 6000리 대장정 끝에 중경에 도착, 한국 광복군에 합류했다는 기록이 발견됐다"며 "이 기록은 장 선생의 자서전 <돌베개>의 기록과도 일치한다"고 밝혔다.<ref name="gtalyoung"/> 이로써 장준하 선생의 일본군 징집 및 탈출 기록이 공개되었다.<ref name="gtalyoung"/>0
|제목=“주검 보자마자 ‘각본이구다’ 생각 들어”“두개골 상처에 성냥개비 넣으니 다 들어갔다“
 
|저자=박경만
전 의원에 의해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유수명부>에서 찾아낸 장준하 선생의 이름(장안준하·張安俊河), 소속부대(제7991부대), 생년월일 및 본적지(평안북도 삭주군 외남면 대관동 258), 부친의 성명(장석인·張錫仁), 역종·병종 및 계급, 공탁금 번호와 상단에 탈출일자 및 탈출지 등이 기재돼 있다.<ref name="gtalyoung"/> 전체 114권으로 구성된 '유수명부'는 [[일본군]]의 해외파견 군인·군속의 명부로 탈출(逃亡) 및 이탈, 사망 등 행방불명된 자의 기록을 날짜와 장소와 함께 기록돼 있으며, 일본군으로부터 이탈하거나 탈출한 한국인 병사들에 대한 기록이 각 권 뒷부분에 따로 정리돼 있다.<ref name="gtalyoung"/>
|작성일자=2012-08-15
 
|확인일자=2012-08-16
병역 내용에 의하면 1944년(소화 19년) 1월 20일 일본군 제65사단 7991부대에 배치됐으며, 같은 해 7월7일 중국 장쑤성(江蘇省) 쉬저우(徐州)에서 탈영한 것으로 나타났다. 명부는 상단에 ‘도망(逃亡) 쉬저우’라고 기재, 장 선생의 탈영 사실을 밝히고 있다.<ref name="munhwa002"/> 이는 장준하가 생전에 자서전 ‘돌베게’에서 밝힌 내용과 일치한다.<ref name="munhwa002"/>
|출판사=한겨레신문
 
}}</ref> 이에 대해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6조에 의거하여 미망인에게 월 143만 1천원의 보상금이 지급되고 있으며, 일원동 아파트도 동 법률에 따라 특별공급받은 주택이라고 밝혔다.{{뉴스 인용
=== 김원봉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 ===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5763458
장준하는 [[조선의용대]]의 수령이자 [[한국광복군]] 1지대장이었던 [[김원봉]]을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장준하는 [[김원봉]]을 가리켜 '판에 박힌 [[공산주의자]].<ref name="dolbaegae205">장준하, 《돌베개》 (도서출판 세계사, 2005) 205페이지</ref>'라며 혹평을 가하기도 했다.
|제목=민주 "장준하 타살의혹" 朴 "조사이뤄져"
 
|저자=
[[1944년]] 일본군 탈출 직후의 장준하, [[김준엽]] 등을 영입하려는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나 [[김원봉]]은 계속 사람을 보내 이들을 설득하려 했는데, 장준하는 [[김원봉]]이 [[일본군]] 탈영병, 학도병들 사이에 이간질을 획책했다고 한다. '김약산의 부하로 파견된 분견대장의 설득공작이 실패한 것을 알아차린 그들은 곧 우리에게 이간공작을 시작했다.<ref name="dolbaegae205"/>는 것이다.
|작성일자=2012-08-17
 
|확인일자=2012-08-17
또한 [[장준하]]는 [[1945년]] 광복 직후에도 그가 이간질을 획책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광복군 대원들의 무지와 행패가 계속될 때 그가 이를 이용하려 했다는 것이다. '일본군 출신 부대로 하여금 [[임정]]이나 [[광복군]]에 대한 불신을 부채질하면서 그 어부지리를 노리는 김원봉의 계산이었다<ref name="dolbaegae328">장준하, 《돌베개》 (도서출판 세계사, 2005) 328페이지</ref>'고 했다. 광복군 편입을 거절하고 버티던 일본군 출신 부대의 책임자 격으로 있던 황모에게 김원봉이 직접 이소민을 파견, 광복군 제1지대로 끌어들일 공작을 했다<ref name="dolbaegae328"/>는 것이다.
|출판사=연합뉴스
 
}}</ref>
일본군이나 학도병 탈영자들을 포섭하는 과정에서 '[[김원봉]] 일파에서는 미인계까지 쓰고 나서는 형편<ref>장준하, 《돌베개》 (도서출판 세계사, 2005) 254페이지</ref>'이라 하였다. 또한 장준하는 [[김원봉]]이 [[광복군]]의 신뢰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계략을 꾸몄다고 비난했다. '김원봉이 열심히 임정과 광복군에 대한 불신작용을 일본군 출신 부대에 가했다.<ref name="dolbaegae328"/>'고 진술했다.
 
장준하는 [[김원봉]]의 민족유일당 결성 운동의 의도 역시 의심하였다. '김약산은 그때 [[김규식]] 박사를 당수로 업고 이끌고 있는 조선민족혁명당의 부당수로 있기는 했으나 이미 판에 박힌 [[공산주의 |공산]]분자의 한사람이었다. 아마 연립정부 내각에 참여하기 위해서 [[조선민족혁명당]]을 조직했던 것 같다.<ref name="dolbaegae205"/>'는 것이다. 그는 [[김원봉]]을 부정적으로 평가했고, 김원봉이 월북함으로서 그의 주장은 신빙성을 얻게 되었다.
 
== 장준하를 연기한 배우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