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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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
유족에 의해 운구된 시신은 [[8월 18일]] 오전에 상봉동 자택 안방에 마련된 빈소에 안치되었다. 부고를 접한 [[함석헌]], 양호민, 김준엽, [[계훈제]] 등이 [[8월 17일]]부터 자리를 지켰고, [[8월 18일]]에는 [[김대중]], [[양일동]], [[고흥문]], [[정일형]] 등 정치인들과, [[김옥길]] [[이화여자대학교]] 총장, [[김동길 (1928년)|김동길]] 교수 등 1백여 명이 빈소를 다녀갔다. [[신민당 (1967년)|신민당]] [[김영삼]] 총재는 외유 중이어서 조화를 보냈다.<ref>{{뉴스 인용
2012년 8월1일 유골을 장준하공원으로 이장하던중, 유골 검시를 통해 뒷머리에 망치로 가격된 상흔이 발견되었다.
|제목 = 나뭇가지 휘청… 미끄러져
|출판사 = 조선일보
|쪽 = 7
|작성일자 = 1975-08-19
}}</ref>
 
[[8월 21일]] 오전 8시에 자택에서 가족 발인예배가 엄수되었다. 이어 유해는 영구차로 [[명동성당]]으로 옮겨져 오전 10시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집전하는 영결미사가 엄수되었다. 신구 합동으로 열린 이 장례식에는 [[백낙준]], [[유진오]], [[김영삼]], [[김대중]], [[박순천]], [[함석헌]], [[양일동]], [[김홍일]], [[김준엽]], [[김동길]], [[천관우]] 등 각계 지인들과 시민 1,500여 명이 참례했다. 영결식 후 유해는 시청앞, 국회의사당, [[중앙청]]을 거쳐 [[서대문형무소]] 앞을 지나 [[경기도]] [[파주군]] [[광탄면]]의 나자렛 묘지에 옮겨져 안장되었다.<ref>{{뉴스 인용
장준하 사후 장준하의 아들들은 보안기관의 구타와 폭행을 당하고 뿔뿔이 흩어지기도 했다. 그의 추모 행사 조차 [[박정희]]정권의 감시로 쉽게 열리지 못했다. 그러나 [[1985년]] [[8월]] '장준하선생 10주기 추모행사'가 있었다. 군사 정권이 붕괴되고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1993년]] [[4월 15일]] 제1회 한신상이 추서되었다.
|제목 = 故장준하씨 영결식
|출판사 = 조선일보
|쪽 = 7
|작성일자 = 1975-08-22
}}</ref>
 
장준하 사후 1주일 뒤에 호림산악회 회원 및 지인들이 사고 현장에서 추모등반 행사를 가졌다. 사후 1개월 뒤인 [[9월 17일]]에는 후학 및 민주화운동 동지 8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고현장에 추모비 제막식을 가졌다.
 
장준하 사후 장준하의 아들들은 보안기관의 구타와 폭행을 당하고 뿔뿔이 흩어지기도 했다. 그의 추모 행사 조차 [[박정희]]정권의 감시로 쉽게 열리지 못했다. 그러나 [[1985년]] [[8월]] '장준하선생 10주기 추모행사'가 있었다열렸다. 군사 정권이 붕괴되고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1993년]] [[4월 15일]] 제1회 한신상이 추서되었다.
 
[[1995년]] [[8월 16일]] 20주기 추모행사 및 추모문집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1999년]] [[11월 1일]]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