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진화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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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의 진화'와 '사회적 진화주의'의 오해'''
 
다윈은 진화론자거나 진화라는 용어를 쓰지 않으려고 무척 신경을 썼다. 마치 마르크스가 자신을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고 했듯이. 그는 ‘변이를 수반한 유전’이라고 했다. 그는 자신의 ‘변이를 수반한 유전’을 표현할 때, 진화라는 용어를 피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그 전문적인 의미가 그의 믿음과 대조를 이루었고, 둘째, 그는 일상적인 의미에 내재해 있는 필연적 진보의 관념에 불안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영어에서 진화와 ‘변화를 수반한 유전’이 동의어가 된 것은 굳센 다윈 지지자인 허버트 스펜서가 선전한 결과이다.(최성일, 어느 인문주의자의 과학책 읽기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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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문제의 핵심은 이렇다. 생물의 진화에서 살아남는 종은 자연과 환경 속에서 우수하고 힘이 센 개체라고 본 것을, 인간의 사회에 적용함으로써 생물학적 진화와 사회적 진화를 동일시 해버린 것이다. 즉 흔히들 널리 쓰는 말로 ‘적자생존. 자연도태’의 생물학적 현상을, 인간 사회에도 같은 방식과 원리로 인식하고 적용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정의는 힘이 정의가 되고, 그 힘은 환경에 잘 적응하는 자, 곧 환경을 선택하고 변화시키는 과정에서 오히려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환경에 의해서 소외되거나 의존된 주변인이 되어 구속되는 모순을 낳고 만다. 이 같은 사회 진화설의 비약은 권력과 힘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폭력과 갈등과 전쟁이라는 문화를 가져오고 말았다.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다윈을 옹호하길 그가 그토록 진화론자로 발표되는 것을 꺼려 한 이유를 밝히면서, 그는 다윈을 철학적 유물론자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굴드는 계속하여 다윈을 이렇게 변호하고 있다. 정작 “진화론의 아버지는 생물의 변화를 구조적인 복잡성이나 이질성의 증가에 의해 규정되는 진보라는 추상적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생물과 그 환경 사이에서 적응성이 증가되는 방향으로 인도되어지는 것으로 인식하여 절대로 고등이다 하등이다 하지 않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굴드는 계속하여 다윈을 이렇게 변호하고 있다. 정작 “진화론의 아버지는 생물의 변화를 구조적인 복잡성이나 이질성의 증가에 의해 규정되는 진보라는 추상적 이념으로서가 아니라, 생물과 그 환경 사이에서 적응성이 증가되는 방향으로 인도되어지는 것으로 인식하여 절대로 고등이다 하등이다 하지 않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생물의 진화와 사회적 진보 사이에 아무런 필연적인 연계가 없는데도, 지금까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화와 진보를 동일시하고, 생물 진화를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사회적 진보나 심리적 판단으로서의 개선과 향상으로 정의하고 있다.
30년 전 굴드가 직시한 진화론을 새삼 확인하는 것은, 종교나 서구 사회가 아직도 다윈과 진화론이 갖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현실이 서글프기 때문이다. 자연은 본질적으로 언제나 그 스스로 완성을 향해 있다. 생명은 진화를 통하여 제 위치에서 완전한 기능을 향한 움직임 속에 있다.
그리고 인문학의 오랜 전통과 화려한 논리가, 어찌하여 생물의 진화라는 사실을 인간의 문화(사회학,심리학)의 눈(잣대)으로 본 진보라는 의미와 동일시해버렸는지, 인간의 문화사에 커다란 실수이자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굴드의 다음 한 마디에 귀를 기울여 본다. “예정된 목적이 생물의 역사를 규제하는 법이란 없다.”
굴드의 다음 한 마디에 귀를 기울여 본다. “예정된 목적이 생물의 역사를 규제하는 법이란 없다.”
<ref>공병효, '교육받은 야만인' 1994. 한성문화사</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