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연 (고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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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생애 초반 ===
[[1003년]] 아버지 상서좌복야(左僕射)를 지낸 이한(李翰)과 어머니는 낙랑군대부인 최씨(樂浪郡大夫人崔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후 증 상서좌복야에 추증되고 소성백(邵城伯)에 추봉된 [[인천]]의 유력 호족 [[이허겸]]의 손자였다. 또한 그의 고모 중 한명인 안산대부인 김씨는 [[김은부]]와 결혼했는데 이들의 세 딸이 [[현종]]의 비 [[원성왕후]]와 [[원혜왕후]], [[원평왕후]] 세 자매였다. 그의 고종사촌 누이 세명이 [[고려 현종]]의 비가 되면서 외척의 반열에 올랐다.
 
그는 당시의 권문세가였던 [[현종]]의 장인 [[김은부]]의 처조카였기에 이미 막강한 정치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ref name="pare1996183">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83페이지</ref> 김씨(金氏)와 결혼하여 그 사이에 11남매를 두었는데, 이들을 통해 권문세가를 이루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 과거 급제와 관료 생활 ===
[[1024년]](현종 15) 3월 유징필(劉徵弼)이 지공거가 되어 주관한 [[고려의 과거 제도|괴과]](魁科)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여, 1031년(덕종 즉위년) 초 우보궐(右補闕)이 되었다. 그뒤 [[이부]][[낭중]](吏部郎中), 어사잡단(御史雜端), 우승선을 역임하고 [[고려 정종 (10대)|정종]](靖宗) 초에 급사중(給事中)에 보직하였다가 지중추원사, 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1047년(문종 1)에 이부상서 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가 되고, 1049년에 수사도(守司徒)에 특별 승진하였으며 1050년에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郎平章事)가 되었다. [[평장사]]에 올라 정계의 핵심 인물로 부상하였다.<ref name="pare1996183"/>
 
내사시랑 평장사에 오른 그는 [[문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는다.<ref name="pare1996183"/> 그리고 세 딸을 모두 [[문종]]에게 시집보냄으로써 조정의 실세가 된다. 임금의 장인이자 실무직 최고위직인 [[평장사]]에 오른 그와 권력을 견줄 만한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ref name="pare1996183"/>
 
=== 문하시중 재직 ===
1050년 그의 딸 셋이 문종에게 시집을 가서 인예태후(仁睿太后)·인경현비(仁敬賢妃)·인절현비(仁節賢妃)가 되었다. 특히 그 중 [[인예왕후]]는 [[순종]]·[[선종]]·[[숙종]]을 낳았으며, [[인종]]에 이르기까지 왕들은 모두 [[인예태후]]의 혈통이 된다. 이렇게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자 사원세력을 장악하는 데에도 신경을 써서 그의 아들 소현(韶顯)은 금산사(金山寺)의 혜덕왕사(慧德王師)가 되었고, 외손자인 [[의천]]은 [[대각국사]]가 되었으며, 진외증손 왕징엄 역시 국사가 되고, 손자인 승통(僧統) 세량(世良)은 현화사(玄化寺)에, 증손자인 의장(義莊)은 현화사에 있으면서 법상종(法相宗)의 세력을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경원이씨가 고려의 최고문벌로 성장하게 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의 아들로 일찍 출가한 [[혜덕왕사]]는 다시 자신의 외조카이자 [[문종]]의 왕자인 [[대각국사]] [[의천]]의 스승이 된다.
 
1052년 입궁한 그의 큰 딸이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되면서 그는 [[문하시랑]] [[평장사]]가 되었다.<ref name="pare1996183"/> 1052년 수태위(守太尉)가 되었고, 이어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를 거쳐 [[1055년]] [[10월]] [[문하시중]]이 된다.
 
[[최충]]이 물러나고 이자연이 시중이 된 뒤부터 [[문종]]의 왕권은 한층 강화된다.<ref name="pare1996183"/> [[최충]]이 유림을 이끌었던 데 비해 이자연은 [[불교]] 쪽 인사들과 가까웠고, 그것은 [[문종]]의 행동반경과도 일치했기 때문이다.<ref name="pare1996183"/> 이자연이 시중이 된 다음 [[문종]]은 두 가지 면에서 강한 의욕을 보인다. 하나는 [[불교]]를 융성시키기 위해 [[흥왕사]]를 짓는 일이었고, 다른 하나는 [[송나라]]와의 국교를 성립하는 일이었다.<ref name="pare1996183"/> 이자연은 문종의 정책을 적극 지지하면서 국정을 안정시켯다.
 
=== 불교 세력 후원 ===
이자연이 시중이 된 [[1055년]] [[10월]] 문종은[[문종]]은 다음과 같이 명령하였다.
 
{{인용문2|옛날 제왕들이 [[불교]]를 숭상하여 왔음을 문헌에서 볼 수 있다. 특히 우리의 [[태조]] 이후는 대대로 사원을 세워 행복과 경사를 축원하여 왔다. 그런데 내가 왕위를 계승하여 어진 정치를 실시하지 못한 관계로 재변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나는 [[부처]]의 힘을 빌어서 나라를 행복하게 하려 하노니 해당 관리로 하여금 적지를 선택하여 [[사원]]을 건설하게 하라.<ref name="pare1996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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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의 이같은 명령이 있자 [[문하성]] 관료들은 산천의 기맥을 훼손시킬 우려가 있다며 강력하게 반대한다. 하지만 [[문종]]은 그들의 말을 묵살하고 거대한 사찰 건립 작업을 명령한다. 이렇게 해서 세워지는 것이 [[흥왕사]]이다.<ref name="pare1996183"/>
 
이자연은 [[사원]]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ref name="pare1996184">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84페이지</ref> 그의 아들 소현이 이미 출가해 금산사의 주지로 있었다.<ref name="pare1996184"/> 그리고 그의 후에는 그의 손자, 증손자까지 줄줄이 출가 행렬이 이어졌다.<ref name="pare1996184"/> 후일 그의 손자 [[이자겸]]이 사원세력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키는 것도 이자연의 사원에 대한 투자와 무관하지 않다.<ref name="pare1996184"/>
태보 문하시중(太保門下侍中) 겸 판상서이부서(判尙書吏部事)에 이르렀다. 그뒤 추성좌세보사공신(推誠佐世保社功臣)에 봉하여지고,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 중서령 감수국사 상주국 경원군개국공(開府儀同三司守太師兼中書令監修國史上柱國慶源郡開國公)이 되었으며 식읍 3,000호가 주어졌다. 벼슬이 추성좌세보사공신(推誠佐世保社功臣)과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와 태사(太師)와 중서령(中書令)과 감수국사(監修國史)와 상주국(上柱國)에 이르고 경원군개국공(慶源郡開國公)을 봉했으며 식읍(食邑) 二千戶를 하사하였다. 시호는 장화(章和)요 문종묘(文宗廟)에 배향(配享)하였다.
 
이자연은 [[불교]]에 대한 후원과 동시에 확장되는 [[유교]]세력의 견제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이자연과 [[문종]]이 사원세력을 키울 당시 사회 전반은 [[최충]]의 선도로 유학열풍이 일어나고 있었다. 따라서 [[문종]]이 사원세력을 성장시킨 것이 단순한 신앙심의 발로는 아니<ref name="pare1996184"/>었다. 대부분의 문신들이 [[유학도]]를 중심으로 힘을 형성하자 [[문종]]과 이자연은 [[불교]]를 융성시켜 그들을 견제하려 했던 것이다.<ref name="pare1996184"/>
 
=== 생애 후반 ===
태보 문하시중(太保門下侍中) 겸 판상서이부서(判尙書吏部事) 이르렀다치사하였다. 그뒤 추성좌세보사공신(推誠佐世保社功臣)에 봉하여지고, 개부의동삼사 수태사 겸 중서령 감수국사 상주국 경원군개국공(開府儀同三司守太師兼中書令監修國史上柱國慶源郡開國公) 되었으며 식읍 3,000호가 주어졌다. 벼슬이 추성좌세보사공신(推誠佐世保社功臣)과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와 태사(太師)와 중서령(中書令)과 감수국사(監修國史)와 상주국(上柱國)의 훈위를 이르고받고 경원군개국공(慶源郡開國公) 봉했으며되었으며 식읍(食邑) 二千戶를3,000호를 하사하였다하사받았다. 시호는 장화(章和)요 문종묘(文宗廟)에 배향(配享)하였다.
 
이자연과 그의 자식들은 [[문종]] 집권 후반기를 주도한다.<ref name="pare1996185">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85페이지</ref> [[1061년]]에 [[개경]]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58세였다. 장화(章和)의 [[시호]]가 추서되고, 나중에 문종묘(文宗廟)에 배향(配享)하였다.
 
=== 사후 ===
경원 이씨 집안의 권력장악은 [[1061년]] 이자연이 세상을 뜬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던 것이다. 거기에는 [[문종]]에게 시집간 세 왕비의 역할이 지대했다. 이자연의 맏딸 [[인예태후]]는 [[순종]], [[선종]], [[숙종]] 등을 낳았기 때문에 적어도 이 시기에 경원 이씨 세력에 필적할 정치 세력은 없었다.<ref name="pare1996185"/>
 
집권 후반의 [[문종]]이 [[송나라]]와의 국교를 정상화하던 시기에 이미 이자연은 죽고 없었다.<ref name="pare1996184"/> 그러나 11명이나 되는 그의 아들들은 건재하였다. 또한 그들을 떠받치고 있던 사원세력과 경원이씨 가문이 문종을 지지하고 있었다.<ref name="pare1996184"/> [[송나라]]와의 국교 정상화는 무난히 추진되었고 당분간 안정을 지속하게 되었다.
 
==가족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