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길 (1586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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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崔鳴吉, [[1586년]] ~ [[1647년]] [[6월 19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 [[성리학]]자, [[양명학]]자, 외교관이다. 본관은 [[전주 최씨|전주]],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창랑(滄浪)이며,<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PPL_6JOb_A1586_1_0013543}}</ref>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완성군에 봉작되었다가 부원군으로 진봉하였다. 영흥 부사(永興府使) 최기남(崔起南)의 아들이다.
 
[[1605년]] [[생원시]]에 입격한후 그해의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젊은 나이에 요직을 두루 거쳤다. [[1614년]] 병조좌랑에서[[병조좌랑]]에서 삭직된 뒤 복권되었으나 [[1617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여 관직을 사퇴했다. [[광해군]]의 정치에 반발하여 그뒤 [[1623년]] [[인조 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완성군(完城君)에 봉군되었다. [[병자호란]] 당시 화의론을 펼쳤으며 항복이 결정된 후 항복문서의 초안을 작성했다. 이후 [[청나라]]와의 협상을 성사시켜 [[인조]]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 대명, 대청 외교를 맡고 개혁을 추진하면서 국정을 주도했다. [[좌의정1636년]]이 된 직후 [[청나라정묘호란]] 파견되는때는 [[사은사청나라]](謝恩使)로 [[심양]]에선봉장을 가서만나 조선인시간을 포로의끌어 석방과 송환,인조의 [[척화신남한산성]](斥和臣)의 송환을피신 교섭,시간을 성사시키고벌었다. [[1638년]] 초에 귀국하여화의와 [[영의정]]이항전을 되었다.놓고 [[1640년김상헌]] [[김류]],등의 [[김자점]]척화신에 등과의맞서 갈등으로화의론을 사퇴했다가주장했다. 1642년에이때 다시직접 영의정에항복문서를 복직했다.지었는데, 그러나척화신 [[명나라김상헌]]와의 비공식적이를 외교관계가찢고 발각되어통곡하자 [[1643년]]항복문서를 [[청나라]]에다시 끌려가 억류되기도 했다모았다.
 
1637년 [[의정부]][[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된 직후 [[청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로 [[심양]]에 가서 조선인 포로의 석방과 송환, [[척화신]](斥和臣)의 송환을 교섭, 성사시키고 [[1638년]] 초에 귀국하여 [[의정부]][[영의정]]이 되었다. [[1640년]] [[김류]], [[김자점]] 등과의 갈등으로 사퇴했다가 1642년에 다시 영의정에 복직했다. 그러나 [[명나라]]와의 비공식적 외교관계가 발각되어 [[1643년]] [[청나라]]에 끌려가 억류되었다. [[1643년]] [[조선]]이 [[명나라]]와 내통하였다는 사실과 관련되어 [[심양]](瀋陽)에 잡혀가 2년간 억류되었다가 [[소현세자]] 등과 함께 풀려났다. [[1645년]] 귀국하여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완성부원군에 진봉(進封)되었다. 사후 화의와 타협을 주장했다 하여 [[성리학]] 명분론자들에 의해 심한 비방을 받았다. [[숙종]] 때에 잠시 긍정적인 여론이 나타났으나 곧 사라졌고 [[조선]]이 멸망한 뒤에야 그의 화의론, 협력론이 현실적이라는 주장이 나타났다.
병자, 정묘호란 당시 주화론의 대표론자로, 전쟁 중 [[주화론]](主和論)을 주장, 화의가 끝나 [[청나라]]군이 돌아간 후 많은 지탄을 받았으나 [[조선 인조|인조]]의 각별한 신뢰를 받았다.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에도 위험을 무릎쓰고 활약하여 공로를 인정받았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와의 화의론을 주장하여 주전론을 주장하던 청음 [[김상헌]], 선원 [[김상용]] 등과 맞섰다. 그의 사상과 정책은 주화론으로 요약할 수 있으나 [[양명학]]에도 큰 호감을 보였다. 유학과 문장에 뛰어나며 글씨를 잘 썼다. [[최기남]], [[윤두수]], [[윤근수]], [[이항복]](李恒福), [[신흠]](申欽)의 문인이다.
 
== 생애 ==
=== 생애 초반 ===
==== 출생과 수학 ====
빙고 별제(氷庫別提)로 [[이조]][[판서]]에 [[추증]]된 최업(崔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직|증]] [[의정부]][[좌찬성]] 수준(秀俊)이고 아버지는 영흥부사영흥부사로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최기남]](崔起南)이며, 어머니는 [[참판]]을 지낸 [[유영립]](柳永立)의 딸 유씨다. 아버지 [[최기남]]에게서 가학을 배우다가 [[윤두수]]의 문하에도 출입하며 수학하였다. 그 뒤 [[1601년]] [[윤두수]]가 죽자 [[윤근수]]의 문하와 오성 [[이항복]](李恒福)의 문하에도 출입하며 글을 배웠으며, [[신흠]]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아버지 최기남을 비롯해 윤두수, 윤근수, 이항복, 신흠 등 다양한 스승에게서 학문을 배운 최명길은 한가지 생각만이 정답은 아니며 사람은 저마다 생각이 다를수 있음을 인정하였다. 일찍이 [[이항복(李恒福) ]]문하와 [[신흠]]의 문하에서 [[이시백]](李時白), [[장유]](張維) 등과 함께 수학한 바 있다.
 
[[이항복]]의 문인과 [[신흠]]의 문인으로 수학할 때 만난 [[김육]](金堉), [[조익]](趙翼), [[장유]](張維), [[이시백]](李時白) 등 소수의 친구들과 만나 오래 교류하였다.
 
여러 스승들에게서 [[성리학]] 학문을 수학한 그는 다양한 학식과 함께 다양한 관점을 접하였다. 또한 [[양명학]]에도 관심을 보였으며 [[명나라]], [[청나라]] 밖에도 선진 문명이 있을 것이라 예상하였다. 또한 [[점술]]과 [[도학]] 등에도 능통하였으며 풍수지리나 병법에도 뛰어났다. [[1602년]] 유학으로 [[성균관]] 유생이 되었고, [[1605년]](선조 38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한 뒤 문과에 응시한다.
 
그는 처음에 [[의정부]][[좌찬성]] 옥성 부원군(玉城府院君) [[장만]](張晩)의 딸 인동 장씨(仁同張氏)와 결혼했으나 상처하고, 종묘서 영(宗廟署令) 허인(許嶙)의 딸 양천 허씨(陽川許氏)와 재혼하였다. 두 부인 모두 최명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 과거 급제와 관료생활 초반 ====
[[1605년]] 최명길은 생원시에[[생원시]]에 1등으로 합격하여 생원이[[생원]]이 되고 바로 진사시에응시한 [[진사시]]에는 8등으로 합격하여 진사가[[진사]]가 된 뒤 바로 그해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다. 이후 권지[[승문원]]을 거쳐 [[예문관]]에 보임되어 요직으로 조정에 진출하였다. [[예문관]]에 보임되었다가 병으로 사퇴를 청하였으나 오히려 [[성균관]]전적(典籍)으로 승진했다. 성균관전적을 거쳐 광해군대에 북인의 권력독점이 심화되던 중 이를 비판했다가 [[북인]]들의 눈에 들게 되었다. [[1614년]](광해군 6년) [[병조]][[좌랑]]으로 있다가 [[명나라]] 사신 일행과 접촉 금지 원칙을 어겼다는 이유와 폐모론 논의를 발설했다는 이유로 탄핵을 받고, 관직을 삭탈 당했다. 이후 [[가평군|가평]](加平)으로 내려가 [[조익]], [[김육]], [[장유]], [[이시백]] 등과 교유하며 학문에 힘썼다.
[[1614년]](광해군 6) 병조좌랑에서 삭직되었으나 그해에 곧 복권되었다. 그뒤 어버이의 상을 당하여 수년간 부모의 3년상을 복상한 뒤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17년]]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여 관직을 사퇴했다. 이후 그는 [[북인]]의 독주가 선조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 유폐에 이르게 되자 [[광해군]]의 정책을 난정으로 규정하고 [[이귀]](李貴)가 중심이 된 반정계획에 참여하였다. 그 후 그는 [[김류]](金瑬) 계열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연합, 그들과의 연대를 통해 반정의 외연고리를 확대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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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병을 일으켜 즉위하다|확인일자 = |저자=인조실록 1권|작성일자=1623-3-13|출판사=조선왕조실록|원본일자=|인용 = }}</ref>
 
[[1623년]](광해군 15년) 봄에 스스로 점을 쳐보고 군대를 출동할 날짜를 정하였다. 반정군은 그가 택한 길일 새벽에 [[한성부]] 주변에 군사를 숨겨두었다가 궁궐에 방화하고 거사를 단행하였다.
반정이 성공하자 [[이조]][[좌랑]]이 되고, 그 해에 [[참의]](參議)로 고속 승진했다가 [[이조]][[참판]]이 되어 비변사 유사당상을 겸임하였으며 [[비변사]] 제조까지 승진하였으며, 그뒤 [[홍문관]][[부제학]], [[사헌부]][[대사헌]] 등을 거쳤다. 이후 반정에 참여한 공로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관에 녹훈되고 완성군(完城君)에 녹훈되었다. [[1624년]] 반정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그를 회유하였으나 [[이괄]]은 최명길의 설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이괄의 난]]으로 임금이 도망가자 [[한성부]]의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이괄의 난]]이 진압된 뒤에도 유언비어 확산을 막으며 인조반정과 연이은 이괄의 난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였다.
 
반정이 성공하자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고, 그 해에 [[정랑]]을 거쳐 [[참의]](參議)로 고속 승진했다가 [[이조]][[참판]]이 되어 비변사 유사당상을 겸임하였으며 [[비변사]] 제조까지 승진하였으며, 그뒤 [[홍문관]][[부제학]], [[사헌부]][[대사헌]] 등을 거쳤다. 이후 반정에 참여한 공로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관에 녹훈되고 완성군(完城君)에 녹훈되었다. [[1624년]] 반정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키자 그를 회유하였으나 [[이괄]]은 최명길의 설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이괄의 난]]으로 임금이 도망가자 [[한성부]]의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이괄의 난]]이 진압된 뒤에도 유언비어 확산을 막으며 인조반정과 연이은 이괄의 난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 당시 그는 무신이 아닌데도 위험 속에서 홀로 임진강을 건너 원수 [[장만]](張晩)을 찾아갔고, 그와 협의하여 계책을 세우고 투항을 독려하는 등 안현(鞍峴) 전투를 승리로 이끎으로써 반란 진압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1624년]] [[이괄의 난]] 당시 그는 무신이 아닌데도 총독부사(摠督副使)직을 자원하였다. 그는 피난한 조정의 총독부사 자격으로 암살의 위험 속에서 홀로 임진강을[[임진강]]을 건너건너가 원수 [[장만]](張晩)을 찾아갔고, 그와 협의하여 계책을 세우고 투항을 독려하는 등 안현(鞍峴) 전투를 승리로 이끎으로써 반란 진압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 개혁 정책과 청렴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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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5년]] [[부제학]]이 되어 호패법의 시행을 주장하고 [[호패법]]당상(號牌法堂上)이 되어 이를 관장하였다.
 
그는 사치하지 않고 검소하였다. 본처 장씨 부인이 아들이 없어서 조카를조카 최후량(崔後亮)을 양자로 들였다가 뒤늦게 부인에게서재혼한 부인 양천 허씨에게서 친자 친자를최후상(崔後尙)을 얻었으나, 그는 의리를 지켜 그 전에 조카를 양자로 삼은 것을 취소하지 않고 그대로 후사로 삼도록 특별히 청해 조정의 허락을 받았다. 동료 공신들의 경제적 비리행위를 규탄하고 개혁을 촉구하는 데 거리낌이 없을 정도로 강직하였다. 이때문에 적을 많이 만들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청렴성과 진솔함, 공정성은 [[조선 인조|인조]]와 [[서인]]당내 정적들까지도 인정하였다.
 
==== 원종 추숭 문제 ====
정변으로 즉위한 [[조선 인조|인조]]는 자신의 생부인 [[조선 원종|정원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 그러나 즉위 초 그는 [[조선 인조|인조]]가 [[조선 선조|선조]]의 대통을 계승했다는 [[김장생]], [[정구]], [[허목]] 등 예학자들의 견해를 무시할수 없어 일단 반대하였다. 그러나 내심 [[조선 인조|인조]]의 뜻을 이해하고 뒤에는 인조의 정원군 추숭을 지지한다.
 
[[1626년]](인조 4년) 인조의 생모 계운궁 구씨(啓運宮 具氏)가 사망하자 장례 문제를 일반 왕자군의 예로 하느냐 대비의 예로 하느냐 하는 의견이 제기되어 논란이 되었다. 이때 그는 대비의 예로 하려는 인조의 의지를 간파, 차자(箚子)를 올려 상복(喪服)을 강등하는 것과 후사를 세우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논하였다. 그리고 또 계운궁의 장사는 일단 일반 왕족의 예에 따라 치르고, 나중에 제사는 제후의 예에 따라 지낼 것과 별도로 사당을 세워 스스로 제사를 주관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 의논이 [[조선 인조|인조]]가 [[조선 선조|선조]]의 대통을 계승했다는 예학자들의 의논과 달랐으므로 탄핵을 받아 체직되었다.
 
[[1629년]]에 인조가 다시 정원군을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서인]] 예학자들이 모두 반대하였다. 이때 그는 [[박지계]] 등 소수와 함께 인조의 생부 추숭을 지지하였다.
 
[[1631년]](인조 9년)에 [[조선 인조|인조]]가 다시 생부 정원군을 소급해 높이고 싶었으나 당시 조정의 신하들은 [[김장생]]의 문인들이었으므로, 김장생의 이론에 따라 이들은 집단으로 반대하였다. 인조는 이들의 간쟁으로 생부 추숭이 어려울까봐 먼저 [[명나라]]에 아뢰어 결정지으려고 했으나 삼공과 이상, 9경이 모두 불가하다며 반대했다. 인조는 특별히 그를 부제학(副提學)으로 임명하여 그 근거를 마련하게 했다. 이는 대체로 그가 처음부터 주장한 별묘(別廟)의 의논은 [[김장생]]의 문인들의 의논에 비해 더 인조의 입장을 배려했기 때문에 인조는 특별히 그의 말을 많이 인용하여 조정의 의논을 꺾기 위해 그를 끌어다가 스스로 힘쓰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그가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소급해 높이는 일은 근거로 들 만한 예가 없고 조정의 의논이 또 일치되지 않았으니, 명나라에 먼저 아뢰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여 바로 추진할 것을 상주하였다. 결국 소수의 지지하에 [[조선 원종|정원군]]은 원종으로 추숭하였고, 이 추숭을 주도한 최명길과 [[박지계]]는 예를 어지럽혔다며 [[남인]]은 물론이고 같은 [[서인]] [[김장생]]의 문도들로부터 심한 비방,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 정묘호란 전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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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강화도]]의 허술한 성곽과 수비조차 박약한 위험 속에서도 조정에서는 화의 문제가 발론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세로 보아 강화가 불가피함을 역설하여 이로부터 강화가 논의되었다. 그는 조선군의 수적 열세와 기마병과 보병의 전투에서 보병이 불리한 점과, 산악지대 전투에 능한 자들인 것 등을 들어 사사로운 명분으로 국토가 황폐화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후금]]군이 대대적으로 들어오자 그는 홀로 화의를 주장하였다. 국서를 보내 강화를 요청하기 전 그는 [[인조]]를 만나겠다고 찾아온 [[후금]]의 장수의 태도를 문제삼아 조야가 반대했으나 홀로 후금의 장수를 만날 것을 건의하였다.
[[정묘호란]] 내내 그는 강화의 불가피함을 역설하여 강화를 주장하였고, 이로 인해 화의가 성립되어 후금이 물러난 뒤에도 많은 비난을 받았으며, 계운궁 신주(神主)의 흥경원(興慶園, 인조의 생부 [[원종]]의 묘)에 합부(合祔, 한 사당에 함께 배향하는 것)하는 문제까지 엮여서 [[홍문관]]의 심한 공박을 받자, [[인조]]의 특별 배려로 [[경기도]][[관찰사]]로 부임하게 된다. 당시 성리학은 명분을 중요시해 오랑캐인 청나라에 항복할 수 없다는 입장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최명길도 현실을 인정해 실리적으로 대처하였다. 그가 화의론, 협상을 주장하자 매국노로 몰릴 것을 염려한 문인들이 그를 찾아와 염려하였지만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겠다며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려 되돌려보낸다. 이후 예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로 [[대제학]]을 겸하였다. [[1635년]](인조 13) 호조판서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병조 판서로 되었으나 병 때문에 [[한성부윤]]으로 나갔다. 그는 여러 관직을 거치며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의 극복에 공헌하여 인조의 신뢰를 얻는다. 그러나 그가 제일 먼저 화의론을 주장한 탓에 화의가 성립되어 후금군이 돌아간 뒤에도 많은 지탄을 받았다.
 
{{인용문2|이미 자강(自强)하지도 못한 데다가 또 약자도 되지 못하면 어떻게 나라를 부지할 수 있단 말입니까? 청컨대 말을 유순하게 하여 닥뜨려 싸움을 늦추소서.}}
 
청나라 사신이 와서 인조를 보려고 하자 척화신들의 반대가 심했으나 그는 '양쪽의 병력이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사신이 그 중간에 있으니, 뜻을 굽혀 한번 접견하소서.'라며 만날 것을 주장하여 성사시켰다. [[후금]]군이 물러가자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그가 강화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유배할 것을 청하였으나 최명길의 주장을 이해한 인조는 단지 추고(推考)하라고만 명하고 덮어두게 하였다.
 
[[정묘호란]] 내내 그는 강화의 불가피함을 역설하여 강화를 주장하였고, 이로 인해 화의가 성립되어 후금이 물러난 뒤에도 많은 비난을 받았으며, 계운궁 신주(神主)의 흥경원(興慶園, 인조의 생부 [[원종]]의 묘)에 합부(合祔, 한 사당에 함께 배향하는 것)하는 문제까지 엮여서 [[홍문관]]의 심한 공박을 받자, [[인조]]의 특별 배려로 [[경기도]][[관찰사]]로 부임하게 된다. 당시 성리학은 명분을 중요시해 오랑캐인 청나라에 항복할 수 없다는 입장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최명길도 현실을 인정해 실리적으로 대처하였다. 그가 화의론, 협상을 주장하자 매국노로 몰릴 것을 염려한 문인들이 그를 찾아와 염려하였지만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겠다며 오히려 그들을 위로하려 되돌려보낸다. 이후 예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로 [[대제학]]을 겸하였다. [[1635년]](인조 13) 호조판서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병조 판서로 되었으나 병 때문에 [[한성부윤]]으로 나갔다. 그는 여러 관직을 거치며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의 극복에 공헌하여 인조의 신뢰를 얻는다. 그러나 그가 제일 먼저 화의론을 주장한 탓에 화의가 성립되어 후금군이 돌아간 뒤에도 많은 지탄을 받았다.
 
이후 [[호조]][[참판]](戶曹參判)으로 전직되었다가 [[병조]][[참판]], [[예조]][[판서]]를 거쳐 [[이조판서]]로 [[대제학]]을 겸하였다. [[1635년]](인조 13) 호조판서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병조 판서로 되었으나 병 때문에 [[한성부윤]]으로 나갔다. 그는 여러 관직을 거치며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의 극복에 공헌하여 인조의 신뢰를 얻는다. 그러나 그가 제일 먼저 화의론을 주장한 탓에 화의가 성립되어 후금군이 돌아간 뒤에도 많은 지탄을 받았다.
 
==== 전란 수습과 화의론 ====
이후에도 [[후금]] 및 [[청나라]]에 대해서는 감정적인 반발 보다는 화친관계를 통해 실력을 쌓을 것과 유연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여 충돌을 피하고 우리의 입장과 이익을 지키자는 주장으로 일관하였다.
 
그뒤 다시 [[의정부]][[우참찬]], [[부제학]], [[예조판서]] 등을 거쳐 [[1632년]](인조 10) 다시 예조판서가 되고 이후 이조판서로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을 겸임한 뒤 호조판서를 거쳐 [[예문관]][[대제학]], [[홍문관]] [[대제학]]을 역임하였다. 1633년(인조 11년)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임하고 체찰부사(體察副使)를 겸임하였다. 1634년 후금은 명나라에 대한 공격에 조선이 원병을 보낼 것과 무역을 허용하는 [[국경개시]](國境開市) 등을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척화파의 주도로 절화(絶和, 화의를 단절함)의 의논이 높아졌는데 그는 '당장은 [[후금]]의 요구에 어느 정도 실력으로 버텨서 몇 년 간은 무사할 수 있으나 그 끝은 심히 우려된다'고 하면서 '원망을 불러일으켜 굳이 병화(兵禍)를 재촉함은 바른 대책이 아니'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소수 사대부들의 정신적 만족을 위해 백성들을 희생시킬 수는 없다는 논리로 이에 맞섰다.
 
[[1635년]] 초 [[이조]][[판서]]직을 사직하고 물러나 쉬다가 몇 달 뒤에 [[호조]][[판서]](戶曹判書)가 되었다. [[1636년]]에는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해 병자호란을 맞게 된다.
 
[[1636년]] [[5월]] [[홍타이지]]가 황제로 칭하자 [[청나라]] 사신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조정에서 명나라의 황제가 있는데 참람하게 황제를 칭한다며 조정에서는 이를 배척하였다. 그는 일단 들어주자 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반대했고, 청나라 사신은 노하여 곧바로 가버렸다. [[청나라]] 사신이 돌아가자 최명길은 이 일로 전쟁이 벌어질수 있다며 신중치 못하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전쟁의 빌미가 발생하였으니, 사전에 전쟁과 수비의 대책을 강구하소서.” 하고, 이어 '빨리 사신을 보내어 청나라의 사정을 엿볼 것'을 청하였으며, 말하기를, “나라의 큰일은 모름지기 심복의 대신들과 상의해야 하고 [[승지]]나 내관(內官)은 모두 들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피난과 병력 준비를 건의하였다.
 
그때 조정의 의논이 거세게 나와 모두 강화를 배척하였으나 그는 혼자 달랐기 때문에 들어가면 경연(經筵)의 신하들이 번갈아가며 그를 매국노, 주화론자 등으로 몰고 갔고 이어 대간과 헌부의 관료들이 번갈아가며 탄핵하였다. 그러나 그는 악의적인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더욱더 극력 말하면서 선유(先儒)의 정론(定論)을 증거로 대기도 하고 선왕조의 지난 행적을 참고로 제시하기도 했다.
 
==== 병자호란 전야 ====
[[1636년]](인조 14년) [[11월]] [[청나라]] 임금 [[홍타이지]]는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국경을 쳐들어왔는데, 선봉이 [[압록강]]을 건넌 지 며칠 만에 서쪽의 교외로 들이닥쳤다. 전황을 듣고 달려와 인조를 수행했는데,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 가려고 숭례문(崇禮門)에 이르자마자 [[청나라]] 기병(騎兵)이 이미 길을 막아버려 되돌아갔다. 이에 인조가 문루(門樓)로 나가 여러 신하들을 불러 계책을 묻자 그가 자청하여 [[청나라]] 군사들을 상대하여 시간을 벌겠다고 하였다.
 
{{인용문2|일이 급박하게 되었습니다. 신이 달려가 청나라 장수를 만나 맹약을 어긴 것을 책망하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청나라 장수가 듣지 않으면 신이 마땅히 그의 말 발굽 아래에서 죽을 것이고 다행히 접견하여 말대꾸를 해주면 조금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입니다. 주상께서는 그 틈을 타 어가(御駕)를 동쪽으로 돌려 빨리 달려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소서.}}
 
그가 [[청나라]] 군사들을 상대해서 시간을 끌겠다고 하자 [[조선 인조|인조]]가 이를 윤허하고 금군(禁軍) 20명을 떼어주었는데 [[숭례문]]을 나서자마자 병사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결국 최명길은 병력 몇 명과 함께 말을 달려 사현(沙峴)에 이르러 [[한성부]]의 입구까지 당도한 [[청나라]]군 선봉군의 장수를 만나기를 청하였다. 그가 청나라 선봉군 장수를 만나 아무런 전쟁 선포가 없었는데도 함부로 군대를 동원했다며 힐책하니, 청나라 장군은 그에게 강화와 전쟁 두 가지 중에 하나를 결정하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최명길이 일부러 답을 내리지 않고 말을 돌려 시간을 질질 끌고 가다가 그날 저녁이 되어서 도성으로 돌아와 [[청나라]] 장수의 화의와 전쟁 중에 택하라는 말을 보고하였다. 그 다음날에도 시간을 끌다가 저녁 무렵에도 답을 주지 않자 [[청나라]] 장수는 그가 자기들을 기만하였다고 해치려고 하였으나 부관들의 만류로 극적으로 목숨을 구하였다. 그 사이 [[조선 인조|인조]] 일행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
[[1635년]] 초 [[이조]][[판서]]직을 사직하고 물러나 쉬다가 몇 달 뒤에 [[호조]][[판서]]가 되었다. [[1636년]]에는 [[병조]][[판서]]가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해 병자호란을 맞게 된다.
 
==== 병자호란 전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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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의 신뢰로 정세가 결정적으로 기울어져, 이듬해인 [[1637년]] [[음력 1월]] 결국 [[조선 인조|인조]]가 직접 [[홍타이지|청 태종]]에게 나아가 항복하였다. 그의 이러한 그의 대응은 [[서인]] 내에서도 그를 안좋게 보던 정적들이 편찬한 《인조실록》에서도 곳곳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그러나 [[조선 인조|인조]]가 [[홍타이지|청 태종]]에게 삼두고배를 한 치욕적인 사건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지목되어 오랫동안 비방에 시달렸다. 그러나 난중의 일처리로 인조의 깊은 신임을 받음으로써 [[1637년]] [[4월]] [[의정부]][[우의정]]에 특별 승진되어 위로는 왕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흩어진 정사를 잘 정리하여 내외가 점점 더 안정되고 그해 가을에 [[좌의정]]이 되었다. [[좌의정]]이 된 직후 [[청나라]]에 파견되는 사은사(謝恩使)로 [[심양]]에 가서 조선인 포로의 석방과 송환, [[척화신]](斥和臣)의 송환을 교섭, 성사시키고 [[1638년]] 초에 귀국하여 [[영의정]]에 이르렀다. [[영의정]]에 올라 대청 ·대명 외교의 복잡한 문제에 대처하고 개혁을 추진하면서 국정을 주도하였다.
 
==== 환향녀 용서 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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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후반 ===
==== 청나라와의 외교 문제 ====
[[1636년]] [[청나라]]와 맹약을 체결하고 1637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칠 때 [[조선]]의 군사들을 파병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그가 나서서 청나라 군에 파병할수 없음을 통보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계속 군대를 출동하여 도우라고 압력을 행사했고 그는 도울 수 없다고 말하였다. 다시 [[청나라]]는 사신을 보내 명나라 정벌을 도우면 큰 선물을 주겠다며 [[조선]]에 청나라 군대를 지원, 파병하라고 주장하자 그는 스스로 심양(瀋陽)으로 달려가 전에 한 말을 인용하여 그들의 요청을 막았다. 청나라에서 장수가 파견되어 또다시 와서 병력의 지원을 강요하자 그는 죽음으로서 파병을 할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는 '군대를 지원하는 것과 성을 내려가 항복하는 것은 다르니, 나라가 망하더라도 의리상 따를 수 없다. 우리나라 대신 중에 한두 사람이 이를 위해 죽은 사람이 있어야 바야흐로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을 것이다.' 하고 거절했다.
 
바로 그는 자신이 [[심양]]으로 달려가 [[명나라]] 정벌군을 파견하지 않는 대신 자신이 그 책임을 감당하게 할 것을 자청하자 인조는 감동하여 표범 갓옷 한 벌을 하사한 다음 직접 만나 그를 전송하였다. [[심양]]으로 가기 전에 이번에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오기 힘들다고 여겨 미리 장례물품과 염습의 물건을 준비해 가지고 갔다. 그가 [[심양]]에 도착하여 [[청나라]] 황제 앞에서 항의하며 굽히지 않으니, 홍타이지는 분노하였으나 나중에 그를 의롭게 여겨 풀어주었다.
 
==== 기득권에 대한 비판 ====
1638년 그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조선]]이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짐을 이유로 들어, 매년 조공으로 바치는 공물의 양을 줄이고 명나라를 치기 위한 징병 요구를 철회할 것을 간청하여 성사시키고 되돌아왔다. [[1639년]](인조 17년) 인조는 오래도록 병석에 누워 있었으며 그를 불러 자문을 청하였다. 수시로 입궐하여 인조의 병석을 돌봤는데, 바로 무고 사건이 발생하여 [[정명공주]](貞明公主)의 시집이 연루되었다. 인조는 그에게 밀지(密旨)를 내려 직접 그 옥사(獄事)를 끝까지 조사하려고 하자 그는 불가하다 하였고, 정명공주 사가 내사가 결정되자 그는 극력 반대하고 별궁(別宮)으로 거처를 옮길 것만 청하여 옥사가 번지는 것을 막았다. 그뒤 일찍이 사이가 벌어진 [[김류]]·[[김자점]](金自點) 등의 세력과의 경쟁과 [[산림]]세력으로부터 매국노와 [[삼전도의 굴욕]]을 불러온 인물이란 비판을 받자 [[1640년]]에 영의정직에서 물러났다. 인조의 사임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단 물러났다.
 
[[성리학]]과 문장에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으며, 글씨에 있어서도 동기창체(董其昌體)로 이름이 있었다. 특히, 한때 [[양명학]]을 혼자서 은밀히 공부하였으며 이를 친구인 [[장유]]나, 양 아들 [[최후량]](崔後亮) 및 손자 [[최석정]](崔錫鼎) 등에게 전수하여 양명학을 보급하고 [[강화학파]]의 기틀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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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들이 없어서 조카를 양자로 삼았지만 보통 친자가 생기면 양자를 취소하는 것과 달리 양자를 취소하지 않고 그대로 후사로 삼도록 특별히 청하여 조정의 허락을 받았다. 또한 동료 공신들의 월권행위와 권력남용을 비판하고 이러한 행위를 묵인한다면 반정을 한 의미가 없어진다며 경고하였다. 이어 동료 공신들의 경제적 비리행위를 계속 질타, 규탄하고 개혁을 촉구하기도 했다.
 
==== 2차 영의정 재임과 억류명나라 외교 문서 사건 ====
[[1640년]] 사임하였다가 [[1642년]] 다시 [[영의정]]을 역임했다.<ref> [http://yoksa.aks.ac.kr/jsp/cc/View.jsp?cc10id=C0000247 한국역사정보 통합시스템] </ref>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나 임경업(林慶業)을 통해 승려 독보(獨步)를 명나라에 보내 비공식적 외교관계를 유지한 일이 첩자들에 의해 [[청나라]]에 알려졌다.
 
남한산성에서 내려가 막 강화할 때 그는 청나라에 대한 항복을 명나라가 불쾌히 여길까봐 도독(都督) 진홍범(陳弘範)에게 공문을 보내 해명하였으나 공문이 중간에 유실될지 알 수 없어 명나라에 갔다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을 구하려 했다. 이에
그러나 [[임경업]]이 [[명나라]]와 내통을 하고, 조정의 반청(反淸) 움직임이 [[청나라]]에 발각되자, 그는 책임을 지고 청나라에 인질을 자원하여 [[소현세자]], [[김상헌]] 등과 함께 청나라로 끌려가 [[심양]]에 감금되었고, [[1645년]]에야 소현세자 일행과 함께 풀려나 귀국하여 계속 [[인조]]를 2년간 더 보필하였다. 문집으로 《지천집》 19권과 《지천주차(遲川奏箚)》 2권, 《경서기의 (經書記疑)》, 《병자봉사 (丙子封事)》 등이 있다. 귀국하여 [[부원군]]에 진봉(進封)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이 되었고, [[어영청]][[도제조]](御營廳都提調)를 지냈다.
조선인 승려 독보(獨步)란 사람이 명나라 장군 홍 승주(洪承疇)의 군영으로부터 일을 알아보기 위해 특별히 [[명나라]]에서 파견되었으므로 최명길은 독보에게 공문을 주어 홍 군문(洪軍門)에게 전달하도록 한 다음 평안도 병사 임경업(林慶業)으로 하여금 배를 준비해 독보의 명나라 행을 도와주도록 하였다. 1641년(인조 19년) 가을에 독보가 [[명나라]] 정부의 회답의 공문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그는 이미 영상에서 물러나 있었으므로 답서를 써서 그에게 부쳤다.
 
이때 청나라 사람이 멀리서 바다의 배를 보고 조선이 명나라와 내통한 줄로 의심한 나머지 와서 힐문하였으므로 많은 돈을 들여 그 일을 무마시켰다. 그러나 홍승주가 청나라에 항복하여 독보가 오고간 일을 자세히 말했다.
 
이때 선천 부사(宣川府使) 이규(李烓)가 은밀히 명나라 상선과 거래한 일이 발각되어 [[청나라]]에서는 조선이 명나라와 밀통한다는 이유로 장군을 보내 [[소현세자]]를 봉성(鳳城) 데려온 뒤 선천부사 이규를 붙잡아다놓고 힐문하였다. 이때 형문을 받던 이규가 은밀한 일을 고하여 살아보려고 그가 명나라에 독보를 보내 해명한 일을 말하자, 청나라 장군은 청태종에게 보고하고 바로 그를 붙잡아다 대질 심문을 하였다. 이때 어떤 사람은 '사건이 반역한 신하 입에서 나왔지만 다른 증거가 없으니, 그런 사실이 없다고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자 그는 '저들이 이미 바다에 있는 배를 엿보고 알았으니 또 증거를 안 얻었으리라고 반드시 보장할 수 없다. 처음에 속였다가 결국 드러나면 그 사건이 필시 주상에게 미칠 것이니, 차라리 속이지 않는 것이 낫겠다. 나와 [[임경업]] 두 사람만 죽으면 그 화를 막을 수 있다.'고 하였다.
 
==== 억류와 석방 ====
인조가 그를 위로하고 백금과 담비 갓옷을 주어 보냈다. 이어 봉성에 끌려가 대질 심문할 때 말하기를, "배를 구하여 중을 보낸 일은 오직 나와 임경업만 같이 하였다. 우리 주상이 명한 것이 아니고 조정의 신하들도 참여한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청나라 장수가 그가 대답한 진술 공초를 심양에 보내고 [[홍타이지]]는 그에게 형구를 씌워 데려오도록 했다.
 
그러나 [[임경업]]이 [[명나라]]와 내통을 하고,한 사실과 함께 조정의 반청(反淸) 움직임이 [[청나라]]에 발각되자, 그는 책임을 지고 청나라에 인질을 자원하여 [[소현세자]], [[김상헌]], [[이경여]] 등과 함께 청나라로 끌려가[[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갔다. 그는 즉시 임경업 등과 [[명나라]]와 내통 음모를 꾸몄다는 이유로 [[청나라]] [[형부]]에서 형문을 받은 뒤 북관(北館) 2년간 감금되었고, [[1645년]]에야 소현세자 일행과 함께 풀려나 귀국하여 계속 [[인조]]를 2년간 더 보필하였다. 문집으로 《지천집》 19권과 《지천주차(遲川奏箚)》 2권, 《경서기의 (經書記疑)》, 《병자봉사 (丙子封事)》 등이 있다. 귀국하여 [[부원군]]에 진봉(進封)되어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이 되었고, [[어영청]][[도제조]](御營廳都提調)를 지냈다.
 
==== 은퇴와 최후 ====
귀국 후에도 [[인조]]의 각별한 신뢰하에 국가의 원로로 정사에 참여하였다. [[1645년]]에는 [[인조]]가 갑자기 급서한 [[소현세자]]의 장례를 3년상이 아닌 7일장으로 탈상하자 잘못된 것이라며 비판하였다. 이는 [[김집]], [[송준길]] 등 소수와 함께 [[소현세자]] 장례식의 잘못을 건의하였지만 왕이 듣지 않았다. [[1646년]] [[인조]]가 [[소현세자]]빈 강씨를 처형하려 할 때는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일반 사류들과 함께 어린 왕손들을 위해서라도 그녀를 용서해줄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소현세자빈 용서 주장에는 [[김집]], [[송준길]], [[홍우원]] 등 소수 인사들이 그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1647년]] 인조 25년 음력 [[5월 17일]] 오랜 병환으로 죽었다.<ref>{{웹 인용|url= 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wpa_12505017_002&grp=&aid=&sid=0&pos=0|제목= 완성부원군 최명길의 졸기|확인일자 = |저자=인조실록 48권|작성일자 = 1647-6-17|출판사=조선왕조실록|원본일자=|인용 = }}</ref> 그가 죽자 인조는 3일간 조회를 중지하고 5일간 고기 반찬을 먹지 않았다. 인조와 봉림대군이 각각 내관(內官)을 보내어 장례를 치를 때까지 호상(護喪)하고 부조를 하였으며 친히 제사를 지내는 등 관례보다 더 후하게 장례를 하였으며 3년상이 끝날 때까지 [[녹봉]]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손자이자 숙종대에 [[영의정]]을 지낸 [[소론]]의 지도자인 [[최석정]](崔錫鼎)이나 [[정제두]] 등의 [[소론]]계 [[양명학]]자 등을 통해 후대로 이어졌다. 사후 조정에서는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린다.
 
=== 사후 ===
시신은 [[충청북도]] [[청주군]] 북이면 대율리(大栗里, 현 [[충청북도]] [[청원군]] 북이면 대율리 253-3)에 안장되었다. 박천(博川)의 지천사(遲川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당시 화친과 항복, 교섭을 주장한 일로 [[조선]]후기에 이르러 그는 매국의 대명사로 인식되어 부정적으로 평가되었다. [[숙종]] 말년에 [[소론]]이 집권하면서 잠시 긍정적인 여론이 나타났으나 곧 사라졌다. 주화론으로 대표되는 그의 사상과 정책은 [[성리학]]적 명분을 중시하던 시대 분위기에 밀려 [[인조]] 말년 이후 거의 모두 부정되고 최명길 자신도 소인배나 불길한 인물로 폄하되었다. 그러나 국가와 민생을 위해 개인의 위험을 돌아보지 않는 헌신과 복잡한 문제들을 풀어간 공로에 대한 찬사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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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리학과 양명학 긍정론 ===
사상은 당시의 대세인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였지만 그는 이미 주자학적 명분론, 묵수주의가 조선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양명학에서 새로운 사상적 활로를 찾았다. 그는 [[성리학]] 원론이나 번다한 예설 자체에 대해 관심을 크게 보이지 않았고, [[성리학]]을 전면 부정하지도 않았다. 또한 명분론 일변도로 흐르지도 않았다. [[성리학]]자이면서도 그는 [[양명학]](陽明學)에도 호감을 보이고 새로운 사상을 소개하였다. 그는 [[장유]] 등과 함께 [[양명학]]적 지식과 그 소양을 익히고 새로운 사상도 있음을 조선에 소개하였다. [[인조반정]] 때는 길흉을 점쳐 거사 시기를 정했을 만큼 점술을 인정받았으며 풍수지리나 병법에도 뛰어났다.
 
=== 친양자에 대한 의리 ===
그는 본부인 인동 장씨에게 아들이 없어 조카인 [[최후량]]을 양자로 들여 후사로 삼았다. 그러나 장씨 부인이 죽고 재혼한 부인 허씨 부인이 아들 최후상을 낳았다. 아들이 없어서 양자를 들였으나 다시 아들이 생기면 파양해도 되었고, [[조선]] 조정에서도 이를 허락하였다. 그러나 그는 최후량을 파양하지 않고 아들이라 하고 그를 장남이라 하고, 허씨 소생 아들 최후상은 차남이라 하였다.
 
그가 친자가 태어났는데도 양자를 파양하지 않은 것을 의문스럽게 여기자 그는 '이미 아비와 자식이 정해지면 저절로 천륜(天倫)의 순서가 있으므로 바꿀 수 없다.'하고 파양하지 않는 소신을 밝혔다. 이어 그는 조정에 청하여 [[최후량]]을 후사로 삼아 가산을 상속시켰고, 사람들은 그의 의리에 탄복하였다. 또한 예를 아는 식자들도 옳게 여기었으므로 이를 특별히 법전에 기록해 조령(朝令)으로 삼았다.
 
=== 주전론에 대한 인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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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 : 최기남(崔起南)
* 어머니 : 유씨, 유영립의 딸.
* 부인 : 인동 장씨(仁同張氏), 옥성 부원군 장만(張晩)의 딸
** 양자 : [[최후량]](崔後亮), 완릉군(完陵君)
** 양 며느리 : 안씨, 안헌징(安獻徵)의 딸
*** 손자 : 최석진(崔錫晉)
*** 손자 : 최석정(崔錫鼎), 숙부 [[최후량]]의 양자가 됨
*** 손자 : 최석항(崔錫恒, [[1654년]] ~ [[1724년]])
** 딸 : 최씨
** 사위 : 윤제명(尹濟明)
** 딸 : 최씨
** 사위 : 신곡(申轂)
* 부인 : 부인 양천 허씨(陽川許氏), 종묘서 영(宗廟署令) 허인(許嶙)의 딸
** 아들 : [[최후상]](崔後尙)
*** 양 손자 : [[최석정]](崔錫鼎, [[1646년]] ~ [[1715년]])
* 외조부 : [[유영립]]
* 사돈 : [[안헌징]](安獻徵)
 
== 평가와 비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