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덕: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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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 생애 초반 ===
==== 출생과 가계 ====
본관은 당성(唐城)으로 자는 가구(可久), 호는 복재(復齋) 또는 화담(花潭)이다. 부위(副尉)를 지낸 [[서호번]](徐好蕃)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아버지 [[서호번]]은 하급무사로 그의 가계는 빈한한 가계였으나, 그가 학문적으로 성취를 하면서 가세를 일으켰다. 어머니 한씨가 공자(孔子)의 사당에 들어가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그를 낳았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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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영특하였으나 가계가 빈곤하여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다가 14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유학 경전인 [[상서]]를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ref name="park194"/> 1502년(14세) ≪서경≫을 배우다가 태음력의 수학적 계산인 일(日) 월(月) 운행의 도수(度數)에 의문이 생기자 보름동안 궁리하여 스스로 해득하였다.
 
==== 청소년기 ====
그가 상서를 공부할 때 서당의 훈장은 '선생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홀로 깊이 생각하여 15일 만에 알아내고 말았으니 너는 [[상서]]를 사색으로 깨우친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ref name="park194"/> 한다. 또한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밭에 나가 푸성귀를 좀 뜯어오라고 하자, 그는 광주리의 반도 차지 않을 정도의 푸성귀만 가지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푸성기를 제대로 뜯지 못한 연유를 물었다.<ref name="park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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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세 때 [[조광조]](趙光祖) 등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賢良科)에 응시하도록 수석으로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개성 화담(花潭)에 서재를 세우고 연구와 교육에 더욱 힘썼다. 그는 [[조광조]] 등이 실패할 것을 예견하였는데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은 몰락하게 된다.
 
=== 은거와 학문 연구활동 ===
==== 은거와 학문 연구 ====
그뒤 학문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였으나 1531년(중종 26) 어머니의 요청으로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더욱 성리학의 연구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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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처럼 은거생활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은 시대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중엽은 사회가 심한 혼란기에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사림과 훈척 세력의 대립이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ref name="park195"/> 관료와 지주 계급은 토지 겸병과 사치 행각을 일삼았고, 이로 인해 농민들은 계속해서 토지를 상실해갔다.<ref name="park195"/> 그는 관직 출사나 속된 시류와의 타협을 거부하는 대신 학문 연구와 교육으로 사회에 기여하리라 다짐하였다.
 
==== 사회 불안과 학문적 성취 ====
[[조선 중종|중종]] 때 여러 번 [[조광조]] 일파나 온건파인 [[김안국]] 일파, [[남곤]] 일파 등이 그를 여러 번 초빙하려 하였지만 그는 나보다 덕망높은 인재들이 많은데 어찌 내가 나가느냐며 모두 거절한다. 혼란한 사회의 사회적 불안은 그를 결코 불행으로 몰고 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사회에 나가지 않고 은둔을 고집한 덕분에 학문적 업적을 쌓을 수 있었고, 학문 수행의 결과물인 [[화담집]] 같은 저작들은 후대 [[조선]]의 [[성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할 수 있었다.<ref name="park196">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96페이지</ref>
 
게다가 만년에 천하의 명기이자 [[시인]]인 [[황진이]]와 함께 자연을 향유하면서도 선비로서의 인격을 잃지 않는 고고한 학자로써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ref name="park196"/> 사람들은 그와 [[황진이]], [[박연폭포]]를 일러 송도삼절이라 이름 부르기도 했다.<ref name="park196"/>
 
그는 [[조선]]의 많은 [[성리학]]자나 [[양명학]], [[실학]] 등 유학자들을 통틀어 스승이 없는 몇안되는 특이한 인물로도 기록된다. 그는 겨우 서당에서 [[한문]]을 꺠우치는 정도의 교육밖에 받지 못했다.<ref name="park196"/> 그의 스승은 자연과 책 뿐이었다. 그 때문에 서경덕은 기존의 유학자들과는 달리 아주 독특하고 진귀한 학문적 업적을 일궈낼 수 있었다.<ref name="park196"/>
 
=== 생애 후반 ===
저서로는 화담집이 있는데, 이 책에서 '원이기', '이기설', '태허설', '귀신사생론' 등의 글을 통해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밝혔다. 만년에는 [[황진이]], 대곡 [[성운]] 등 소수의 인물들과 교류하며 시문으로 소일하였다. 또한 [[허엽]] 등 소수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철학을 구술하여 기록하게 했다.
 
[[조선 인종|인종]] 즉위 후 [[이언적]]은 그를 초빙하려 하였지만 사양하였다. 오히려 그는 [[조선 인종|인종]]의 수명이 짧음을 예언하고,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니 [[이언적]] 등은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1545년]] [[조선 명종|명종]]이 즉위하자 [[이언적]] 등이 다시 그를 조정에 출사하여 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서경덕은 자신보다 유능한 인재가 많을 것이라며 이를 거절하였다.
 
[[1546년]](명종 1년) 58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 사후 ===
명종 때 [[이준경]] 등에 의해 여러 번 증직 건의가 있었으며, 6품 이상의 실직을 역임하지 않았다 하여 3품 이상의 직책에 증직을 청하는 부탁은 거절되었다. [[1567년]](명종 22년) [[2월]] [[증직|증]]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추증]]되었다.
 
그 뒤 선조 때인 [[1575년]] [[증직|증]] [[의정부]][[우의정]]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증직|증]] [[의정부]][[좌의정]]에 추서되었다. 그뒤 문묘 종사 후보자로 올랐으나 도학 사상도 일부 가미되어있다 하여 거절되었다. [[1585년]]에는 [[신도비]]가 세워지고, 개성의 숭양서원, 화곡서원 등지에 제향되었다.
 
그의 문하생들은 대체로 붕당 출현 이후 [[동인]]이 되었다가 [[동인]]의 남북 분당 이후 [[북인]]이 되었고, [[북인]]이 [[1623년]](광해군 15) [[인조 반정]]으로 정계에서 완전히 몰락하면서 그의 사상은 평가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맥 중 일부는 [[남인]]으로 계승되었다. 제자인 [[민순]](閔純)의 문인은 [[윤효전]]으로 그는 백호 [[윤휴]]의 아버지였다. 또다른 제자는 [[박지화]]의 문인인 [[허교]](許喬)로 그는 [[허목]]의 아버지였다.
 
== 평가 ==
만물의 이치를 이해하고자 하는 [[철학자]]로서의 업적을 남겼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우리역사의 수수께끼》에서 서경덕의 이론 중 [[이기설]](理氣說)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유물론]]의 원류로 평가받기도 한다고 말한다. [[황진이]],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유명하다.
 
== 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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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상과 신념 ==
=== 실천 중심론 ===
그는 실천과 직접 연구, 탐구를 통해 진리를 알아낼 수 있다고 판단했다. 진리는 누군가 알려주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 찾아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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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록은 그가 얼마나 실험적이고 과학적인 인간인가를 잘 드러내고 있으며, 또한 그가 평생을 두고 일구었던 [[유물론]]적 주기철학의 방법론이 무엇이었는지를 가르쳐주고 있다.<ref name="park195"/>
 
=== 생사일여론 ===
그는 기와 이가 둘이 아닌 하나이며 기가 곧 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사람이나 생명이 살아있을 때는 기가 있고 죽었을 때는 그 기가 빠져나가는 것이며, 다만 육체에서 기가 빠져나갔지만 기는 소멸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의 학문적 요체는 끊임없는 사색에 있었다. 그는 물질의 힘이 영원하다고 믿었으며, 물질의 분리는 단순히 형체의 분리이지 힘의 분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ref name="park196"/> 그것은 곧 서구의 [[물리학]]에서 말하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과 비교되고 있다.<ref name="park196"/> 그는 심지어 죽음 조차도 생물에게 일시적으로 머물러 있던 기(에너지)가 우주의 기에 환원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생사일여(生死一如)를 주장함으로써 우주와 인간, 우주와 만물이 둘이 아닌 하나라는 이론을 정립시켰던 것이다.<ref name="park196"/> 그의 이 같은 독특한 학문과 사상은 [[이황]]과 [[이이]] 같은 학자들에 의해 그 독창성을 인정받아 [[조선]] 기 철학의 중심으로 자리하게 된다.<ref name="park196"/>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기 철학]]자인 [[최한기]]는 그의 학문을 사숙하였다.
 
== 가족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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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인 : 이씨, [[이계종]]의 딸
** 아들 : 서응기(徐應麒)
 
== 평가 ==
만물의 이치를 이해하고자 하는 [[철학자]]로서의 업적을 남겼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우리역사의 수수께끼》에서 서경덕의 이론 중 [[이기설]](理氣說)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유물론]]의 원류로 평가받기도 한다고 말한다. [[황진이]],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유명하다.
 
== 기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