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 엄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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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성종의 또다른 후궁인 [[귀인 정씨 (성종)|귀인 정씨]]와 함께, [[폐비 윤씨|중전 윤씨]]를 모함하여 폐출케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후궁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조선 연산군|연산군]]은 그녀와 정씨를 극도로 미워하였다. 결국 연산군은 [[갑자사화]]를 일으키면서, [[1504년]] [[음력 3월 20일]] 밤, 연산군은 [[창경궁]] 뒷뜰에 엄씨와 정씨를 결박시켜놓고 몽둥이로 때려서 살해하였다. 그녀가 죽은 뒤 그녀의 시체는 모두 찢겨 젓갈로 만들어졌고, 연산군은 그것을 아무데나 뿌려버리도록 지시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연산 10년(1504) 3월 20일 5번째 기사.</ref>.
 
또한 엄씨의 가족들은 모두 참형을 당하였으며, 그녀의 유일한 소생인 [[공신옹주]](恭愼翁主) 유배를폐서인이 당했다<ref>《조선왕조실록》연산 11년(1505) 6월 15일 1번째 기사.</ref>유배되었다. 그러나 엄씨와 그 가족들, 공신옹주 등은 모두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복위되었다복위되었으며, 공신옹주는 유배 시 남편의 신주를 품고 가 제사를 지내어 그 절의가 뛰어나다는 이유로 곡식을 하사받기도 하였다<ref>《조선왕조실록》중종 10년(1515) 6월 1일 2번째기사 </ref>.
 
== 가족 관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