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 (후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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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약 韓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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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韓遂,[[146년]]~ [[215년]])는 [[중국]] [[후한]] 말기 [[서량]](西凉) 지방의 군벌이다. 양주 금성(金城)군 출신이며 [[자 (이름)|자]]는 문약(文約)이다. 한약('''韓約''') 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ref> (후한서 동탁전</ref>)
 
== 변장ㆍ한수의 난 ==
 
[[광화 (후한)|광화]] 7년([[184년]]), 서량의 강(羌)족이 반란을 일으켜 호(胡)족인 [[북궁백옥]](北宮伯玉)과 이문후(李文侯)를 장군으로 추대했다. 이들은 [[변장 (후한)|변장(邊章)]]과 한수를 끌어들여 군사들을 지휘하게 했는데, 이 때문에 변장ㆍ한수의 난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호강교위 영징(伶徵)과 금성태수 진의(陳懿)를 죽였다.
호(胡)족인 [[북궁백옥]](北宮伯玉)과 이문후(李文侯)를 장군으로 추대했다.
이들은 [[변장 (후한)|변장(邊章)]]과 한수를 끌어들여 군사들을 지휘하게 했는데,
이 때문에 변장ㆍ한수의 난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들은 호강교위 영징(伶徵)과 금성태수 진의(陳懿)를 죽였다.
 
[[중평 (후한)|중평]] 2년([[185년]]) 8월 조정에서는 사공(司空) [[장온 (후한)|장온(張溫)]]을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삼아 변장과 한수를 토벌하게 하였다.
당시 장온의 부장으로 참전했던 [[동탁|동탁(董卓)]]이 반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자 한수는 변장과 함께 유중(楡中)으로 달아났다. 장온은 탕구장군(盪寇將軍) 주신(周愼)에게 이들을 쫓게 했다. 당시 주신의 부장이었던 [[손견|손견(孫堅)]]은 반란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자고 했으나 주신은 듣지 않고 유중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한수와 변장이 거꾸로 토벌군의 보급로를 차단했기 때문에 주신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삼아 변장과 한수를 토벌하게 하였다.
당시 장온의 부장으로 참전했던 [[동탁|동탁(董卓)]]이 반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자
한수는 변장과 함께 유중(楡中)으로 달아났다. 장온은 탕구장군(盪寇將軍) 주신(周愼)에게 이들을 쫓게 했다.
당시 주신의 부장이었던 [[손견|손견(孫堅)]]은 반란군의 보급로를 차단하자고 했으나 주신은 듣지 않고 유중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한수와 변장이 거꾸로 토벌군의 보급로를 차단했기 때문에 주신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한수는 변장, 북궁백옥, 이문후를 모두 죽이고 중평 4년([[187년]]) 10만 명을 거느려 농서(隴西)를 공격했다. 농서태수 이상여(李相如)는 한수에게 항복했다. 양주(涼州)자사 경비(耿鄙)는 한수를 토벌하려 했으나 적도(狄道)에서 부하에게 배반당해 죽었고, 한수는 한양(漢陽)태수 [[부섭|부섭(傅燮)]]과 싸워 그를 죽였다. 한수의 세력이 커지자 경비의 부장이던 [[마등|마등(馬騰)]]은 한수에게 가담하였다. 한수와 마등은 적도 사람 왕국(王國)을 자신들의 주군으로 추대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조정은 [[황보숭]](皇甫嵩)을 보내 반란군을 진압하게 했다. 황보숭이 반란군을 상대로 연달아 승리하자, 한수는 왕국을 내쫓아 죽였다. 이후 반란군의 인물들이 서로 다투면서 내부 분열로 무너졌다.
이후 한수는 변장, 북궁백옥, 이문후를 모두 죽이고 중평 4년([[187년]]) 10만 명을 거느려 농서(隴西)를 공격했다.
농서태수 이상여(李相如)는 한수에게 항복했다. 양주(涼州)자사 경비(耿鄙)는 한수를 토벌하려 했으나
적도(狄道)에서 부하에게 배반당해 죽었고, 한수는 한양(漢陽)태수 [[부섭|부섭(傅燮)]]과 싸워 그를 죽였다.
한수의 세력이 커지자 경비의 부장이던 [[마등|마등(馬騰)]]은 한수에게 가담하였다.
한수와 마등은 적도 사람 왕국(王國)을 자신들의 주군으로 추대했다.
상황이 악화되자 조정은 [[황보숭]](皇甫嵩)을 보내 반란군을 진압하게 했다.
황보숭이 반란군을 상대로 연달아 승리하자, 한수는 왕국을 내쫓아 죽였다.
이후 반란군의 인물들이 서로 다투면서 내부 분열로 무너졌다.
 
== 이각과의 대립 ==